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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제14화 무역…8·15전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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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마카오」무역>
전회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1947년3월 「피어리오드」호가 인천항에 들어오고부터는 세칭 「마카오」무역이 시작됐다.
「장크」 무역이 중국대륙의 여건변동으로 쇠퇴해가고 있던 중에 이 「마카오」 무역선의 입항은 당시 무역업계에서 실로 대단한 화제였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그때만 해도 우리 나라는 외교관계를 맺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선박이 자유로이 외국항에 입항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어느 정부도 우리 나라로 향하는 선박이나 수출물자의 출항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가능한 것은 오직 밀무역뿐이었다. 「장크」무역을 일종의 밀무역으로 봐야하는 이유는 당시군정당국이 수출입허가를 하는 등 통제를 하긴 했지만 상대방정부의 허가가 없는 무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쌍방정부가 함께 용인하는 『합법적인 무역』이 이 「마카오」무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포르투갈」영이던 「마카오」정청이 한국으로 가는 물자에 수출승인서를 발급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해방 후 최초의 합법적인 무역선으로 우리 나라에 온 「피어리으드」호를 끌고 온 사람은 「홍콩」에 살던 남일성이라는 한국인 청년이었다. 「장크」선만 상대해온 우리에게는 놀랄 만큼 큰 2천t급 화물선에 생고무·양복지·신문용지 등 귀중한 물자를 가득 싣고 왔다. 이때도 역시 거래방식은 물물교환이어서 돌아갈 때에는 일본인들이 캐두었다가 버리고 간 중석·「몰리브덴」·연·아연 등의 비철금속 원광석과 마른 오징어·해삼 등의 수산물을 싣고 갔다. 「마카오」무역은 번성해갔다. 그 다음 배부터는 역시 「홍콩」에 살던 이순우라는 청년이 자주 들어왔는데 그해 어름에는 부산으로 「마카오」 무역선이 오기 시작, 부산이 인천 못지 않게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카오」 무역은 단지 「마카오」정청이 허가한 무역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뿐 실상 들어오는 물건은 모두 「홍콩」것이었고, 오는 사람도 모두 「홍콩」에 사는 화상이거나 우리나라사람이었다. 「홍콩」에서 물건을 실으며 또 대개는 「홍콩」에서 곧장 한국으로 향하는 배이면서 그곳 정청에서 수출허가를 해주지 않으니까 「마카오」 정청에서 허가를 받아 「마카오」물건을 「마카오」에서 싣고 오는 것처럼 해서 우리 나라에 온 것이 바로 이 「마카오」무역이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사람으로 직접 이곳에 가서 무역선을 끌고 온 사람은 드물고 대개 현지 교포들이 화상들의 자본을 배경에 업고 이를 대행했다.
정청의 허가를 받는 일이 용이하지 않은데다가 설사 허가를 받는다고 해도 당시 상황으로는 많은 위험과 제약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당시 「마카오」 무역은 생고무·양복지·신문용지를 필두로 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잡화를 공급해주었다.
일찌기 우리 나라의 근대공업은 고무공업과 섬유산업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할만큼 전국에는 많은 고무공장과 면방공장이 있었다.
국민의 의생활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이들 공장은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상당수가 북한에 남게됐으며 남한에 있는 것도 원료난 때문에 가동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생고무는 인기였으며 양복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편 정치·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범람했던 각종 정치·사회단체의 선전활동은 종이수요를 무진장으로 증가 시켰으며 때문에 신문용지 역시 생고무나 양복지에 못지 않게 인기 있는 물자였다. 이런 물자들이 「마카오」무역을 통해 손에 들어왔기 때문에 당시 양복지는 『마카오지』, 신문용지는 으레 『마카오지』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질 좋은 양복지를 놓고 『마카오지』라고 부르는 사람을 간혹 본다. 「마카오」무역 그 자체는 합법이었지만 당시 밀수입도 어지간히 성행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정청에서는 늘 밀수를 막으려고 신경을 썼지만 워낙 물자가 부족했던 데다가 행정기구도 제대로 경비돼 있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에 줄기는커녕 늘기만 했다.
대상지역은 주로 중국과 일본이었는데 일본은 1948년에 와서 부쩍 늘었지 그 이전에는 주로 중국이었다.
양자강 이북이 적화됨에 따라 이 시기에 와서는 상해와 「홍콩」「마카오」 등지를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이 지역들을 거점으로 밀수가 성행했다. 들여오는 물건으로는 설탕·소금·한약재·「페인트」 같은 것이 특히 많았고 그 댓가로는 수산물과 모피류, 그리고 역시 거래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순금이 많이 유출됐다고 한다.
그러나 군정당국은 이 시기에 교역에 필요한 제도를 하나둘 갖추기 시작했으며 차차 질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당시 상무부장(상공부장관)은 지금도 무역업계의 원노로 활약하고 있는 오정수씨(한국 갈포공예사장)였으며 무역국장은 최만희씨였는데 이해 7월부터 수출입허가서가 정식 발급되기 시작했으며 조선환금은행(현 외환은행전신)이 개점됐다.
한편 김용주씨가 사장으로 있던 조선우선은 갖고있던 낡은 배 1척을 이 무렵에 수리, 다음에 얘기할 「홍콩」 무역 때 정기항로를 개설하고 이 배를 「금천호」라고 이름 붙여 취항시켰는데 그 배는 지금 해양대학에서 실습선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계속>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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