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꽃 재배로 재기한 「아르헨티나」농업 이민|붸노스아이레스=김석성 순회 특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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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꽃을 좋아하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카네이션을 공급하는 윤태문씨(55·본적 대구시 신천동 3구) 집은 아르헨티나의 한국 이민 가운데 단 하나 밖에 없는 꽃 재배 농가. 「붸노스아이레스」에서 56km 떨어진 프로렌시아에서 5년째 꽃 재배를 하고 있는 윤씨의 농장 안 11개의 온실에는 붉고 흰 카네이션이 눈부실 만큼 가득 차 있었다.
프로렌시아 지방은 아르헨티나에서도 이름난 꽃 재배 단지이다. 카네이션·장미·글라디올러스·국화 등, 이곳에서 생산되는 꽃은 「붸노스아이레스」시 뿐만 아니라 꽃이 모자라는 남부 아르헨티나의 각주에 비행기편으로 보내지기도 한다.
아르헨티나의 꽃 재배는 이미 40여년 전부터 일본인 이민이 거의 장악하고 있는 실정으로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꽃 재배를 하는 일본인 농가는 5백 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이에 비해 한국인 꽃 재배 이민은 윤씨 집 한집 뿐. 최근 칠레의 꽃 재배 이민 김영식씨(대한 농예 주식회사 대표 이사)가 칠레 정부의 좌경으로 아르헨티나로 옮겨와 붸노스아이레스 시 근교에 농장을 계약했으나 아직 생산 단계에는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윤씨 집이 꽃 재배를 시작한 것은 1965년4윌, 파라과이 19차 농업 이민 케이스로 붸노스아이레스 항에 내렸으나 파라과이 농업 이민의 실패로 갈 곳마저 잃어버린 신세가 되면서부터였다.
하루 숙박료 5백 「페소」(한국 화폐 가치와 거의 같음)짜리의 부둣가 하숙집에서 13일 동안 머물러 있었으나 달리 묘안이 나서지 않아 부인과 장남 응섭(당시 20세) 차남 대섭(18) 3남 대환(16) 막내 정환(8) 등 가족 6명이 한자리에 모인 끝에 무턱대고 일자리를 얻어 나서기로 했다. 그때 남은 돈은 단돈 1백 달러. 윤씨는 『돈 벌러간 이민을 그때처럼 후회해 본 일이 없었다』고 오도가도 못 할 뻔하여 초조했던 당시를 되새겼다.
가장 고생스러웠던 그 무렵의 생활을 윤씨의 차남 대섭군은 생생히 일기에 적었다.

<1965년 5월1일(월·맑음)
『오늘도 아버지는 일자리를 얻는다고 나가셨다. 살아가자면 돈이 필요한데 먼 이국에서 돈이 떨어지니 우리 집의 앞길이 캄캄하다. 나는 오후에 우리가 거처할 집을 얻으러 나섰다. 웬만한 집세는 10만「페소」이상 이다. 150번 버스 종점의 판잣집 한 채를 알아봤더니 3만5천「페소」를 달라고 한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으나 아무리 이민 와서 돈이 떨어졌기로 판잣집에서야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저녁을 먹지 않았더니 배가 몹시 고프다. 미래를 꿈꾸며 그냥 자자.』>
윤씨가 처음 일자리를 얻은 곳은 「오끼나와」출신의 어느 일본인 꽃 재배 농장. 한 사람 앞에 1만「페소」씩 받기로 하고 윤씨 가족 4명이 고용인으로 일자리를 얻게 됐다. 그러나 적은 수입에 비해 일거리는 너무나 고되기 짝이 없었다. 대구에서 작은 방 직업을 하던 윤씨 가족이 꽃 재배를 해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고생은 더욱 심했다. 겨울에는 아침·저녁 온상에 나가 숯불을 피우며, 온도를 조절해야 했고, 43도까지 치솟는 뜨거운 여름철에도 꽃 수송 차량에 대려면 온탕 같은 온실에 들어가 꽃을 꺾어내야 했다. 특히 「카네이션」꽃의 가장 무서운 적은 아르헨티나의 개미떼.
이 개미떼들은 80m 깊이의 땅속에 집을 짓고 살면서 연한 카네이션 꽃잎을 먹이로 따들일 때는 대열을 3백여m나 길게 지으며 온상에 침범한다.
이런 때는 개미의 대열을 끊고 약을 뿌리거나 그래도 심할 때는 짚단을 개미떼 위에 쭉 깔아 놓고 석유 불을 지르는 작업을 한다.
이렇게 1년 동안 꽃 재배를 배운 윤씨 집은 다음 해에는 4·6제로 온상 11동을 일본인 농장주로부터 빌어 카네이션 재배에 나서 재미를 보았다. 이어 그 다음 해에는 이웃의 아르헨티나 원주민으로부터 연 사용료 10만「페소」로 농지 1ha를 빌어 온상 11동을 만들고 본격적인 카네이션 재배를 시작했다.
6식구가 11동의 온상을 재배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으나 자신들이 가꾸는 보람으로 온 가족이 밤 낮 없이 일했다.
모종한지 6개월만에 꽃을 파는 카네이션 재배는 온상 1동(6m×40m) 당 모종 4천5백개를 가꿀 수 있다. 이에 소요되는 생산비는 약8만 「페소」. 6개월이 지나면 하루에 11동에서 2천 송이를 딸 수 있다. 하오 5시쯤 붸노스아이레스의 꽃 도매상으로부터 꽃 운반 차가 오면 l백 송이씩 담은 꽃 바께쓰를 차에 실어낸다. 이렇게 해서 벌어들이는 하루 수입은 2만「페소」내지 2만3천「페소」. 꽃이 많이 필요로 하는 날엔 하루에 15만 「페소」씩 수입이 오르는 날도 있다.
남의 꽃집 고용살이로 시작한지 2년만에 카네이션의 단일 재배 온상을 11동이나 가꾸게 된 윤씨 가족은 이제 「프로렌시아」꽃 재배 조합에도 4684번으로 등록하게 됐다. 작년에는 소망의 「시볼레」반 트럭까지 사들인 윤씨는 내년에는 6동을 더 늘려 17동의 온상에 카네이션을 가꾸겠다고 자신 만만하다. 윤씨는 마치 자신을 가리키듯 『한국 이민들이 조급하게만 굴지 않으면 농업 이민으로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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