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한인 50년 사』집필한 김원용 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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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주를 무대로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의 결속을 위해 반세기를 보낸 김원용 옹(81)이 고국을 찾았다. 안창호·이승만·박용만·김호(정진)씨 등과 독립 운동을 하면서 행동 대장으로 활약했던 김 옹은 광복 조국에서 잠시 입법 위원도 지냈다. 그러니까 23년만에 다시 조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고국을 향한 향수는 노구의 수만 리 여정도 피로하지 않은 듯. 『조국의 모습을 더 한번 보고싶었고 내가 맡고 있는 대학생에게 주는 장학 기금에 대해 협의도 할 겸 1개월 정도로 다니러 왔다』는 김 옹은 장학 단체 한인 재단의 책임을 맡고 있다. 그는 또 이번에 그의 미주에서의 민족 운동 최후의 사업으로 저술한 『재미 한인 50년 사』의 국내 출판 건을 매듭짓고 뜻밖의 수확이라면서 기뻐했다.
국판 180면으로 8월중에 국립 도서관에서 발간할 이 책은 한미 조약 이후 미국에서의 한국인의 생활상과 일제하에서 독립 투쟁하는 모습을 서술한 것이다.
앞으로 이 역에서의 한민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는 뒷사람에게 미루었다는 김 옹은 『나라 잃은 설움을 되씹으면서 독립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 그래서 내가 이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썼을 뿐』이라고 말했다.
58년 미국에서 출판된 이 책의 국문판은 4백여 면에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활자가 없어서 일일이 손으로 써서 사진판 인쇄를 했다. 이를 이번에 2∼3세 교포와 외국인을 위해 영문으로 내는 것. 초판이 나올 때도 국내 출판을 주선했으나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씨와 사이가 좋지 않아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1917년에 도미했던 김 옹은 당시 미주의 한인 단체인 대한인 국민회에 들어가 전국을 다니면서 한인을 단체 소속으로 집결시켜 나갔다. 하와이에서는 「국민 보」의 발행인으로, 또 섭외 위원을 맡아 상해 임시 정부에 보내는 운동 자금의 총책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단체도 이승만씨의 개입으로 안창호씨의 흥사단과 박용만씨의 독립단, 이승만씨의 동지회로 분열돼 버렸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김 옹은 독립 운동만은 공동 보조를 취하자고 역설, 재미 한인 연합 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 총장직을 맡았었다.
김 옹은 신구 세대의 충돌 기가 지난 재미 교포 사회는 앞으로 젊은 사람들이 한인의 긍지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잘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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