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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서울수복<6>행정과 치안|「6.25」20주 3천여 증인회견 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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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도강증 만들어 질서유지>
정부의 환도가 전격적이었던 만큼 이에 따른 수도의 행정과 치안질서의 회복도 빨랐다. 정부는「유엔」군의 인천 상륙 직후에 서울수복에 대비하여 30여명의 행정수복요원을 비밀히 임명, 대기시키고 있었다. 또한 3개월의 적치 하에서 해방된 잔류시민들은 발벗고 나서 시정과 치안회복에 협조했다.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지만 전시모리배가 이 기회에 한몫보려고 날 뛰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행정과 치안질서 회복에 관한 관계자들의 증언은 약간 엇갈리는 대목도 있는데, 이는 명령체제가 단일화되지 않아 각부서가 제각기 독자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송효순씨(당시101헌병대장=중령·예비역준장·전 한전 이사.47)『9월28일에 헌사작명 66호로 내가 헌병 4개 중대를 이끌고 경인지구로 가게됐어요. 임무는 이 지역의 치안확보, 부역자적발, 노획물자의 압수처리 이관, 후퇴 시 잔류장병의 심사 처리 등이었어요.
우선 장교5명과 사병1백19명을 선발해서 여수 호에 태워 인천을 거쳐 10월l일에 서울에 들어와 본부를 지금의 국립도서관 옆 2층 건물에 차렸습니다. 이 건물은 며칠 전까지 괴뢰들이 소위정치보위부를 차리고 우익인사들을 잡아다 고문하던 자리지요.
한강에 부교를 놓고 건너왔는데 1주일 후까지도 아기를 업은 채 손목을 묶이고 피살된 시체 등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이 떠내려왔어요.
헌병1중대(중대장 박명엽 소령)를 지금의 헌사자리에, 2중대(중대장 노원태 대위)를 낙원동 건국대학 자리에, 3중대(중대장·처음에 최광빈 대위, 그후 박태원 대위)를 남대문로2가에, 5중대(중대장 유병국 대위)를 지금의 용산 헌병대 자리에 각각 배치하고 본격적으로 업무를 수행했어요.
10월초에는 아직도 밤에는 숨은 적「게릴라」들의 방화 등 치안이 완전치 못한데다 한몫보려는 전시모리배들이 날뛰었어요. 서울의 여러 집들이 비었고 재산이 그대로 있었으니까요. 서울사람들끼리 집어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지방에서 자동차를 갖고 와서 털어 가요. 개인 집의 재산도구 뿐 아니고 큰 공장 창고 등의 물품이 대상이지요. 그래서 나는 도강증이란 것을 창안해 냈어요. 한강을 건너려면 이 증명서를 발급 받도록 한 거지요.
신분이 확실한 자로서 공무로 왕복하는 사람에게만 내주었어요.
그 외 사람은 무조건 한강을 못 건너게 했구요. 이 도강증을 얻으려고 별별 일이 다 벌어 졌어요. 좀 나쁜 부작용이 있던 것도 사실이구요. 우리 101헌병대는 1·4후퇴까지 계속 경인지구 치안확보에 노력했읍니다.
이 동안에 가장 인상적인 일은 황해도 남천에서 홍삼을 1백53상자 노획물자로 압수한 것과 우리헌병대원이 강원도 문막에서 2천여 포로를 호송하다가 적패 잔병의 습격을 받았지만 오히려 포로들의 도움으로 그 패잔병들도 포로로 잡은 일들입니다.』 <시내곳곳에 방치된 시체>
▲이익흥씨(당시 서울시별 국장·전 내무장관·현 서울시내「버스」조합이사장·66)『9월 중순쯤에 정부에서는 서울이 수복될 때 수도의 치안확보를 대외적인 체면을 생각해서 경찰이 주로 담당하되 군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시경국장에 임명토록 결정했어요. 그래서 헌병부사령관이던 내가 그 자리를 맡게되었지요.
나는 대구서 서울의 10개 경찰서장과4개 소방서장을 임명하고 수도경찰요원 4백명, 서울시직원 1백명을 각각 확보했습니다. 9월25일에 간부급만 45명 데리고 미군기 편으로 김포비행장에 내렸어요.27일 아침에 마포 강을 건너와 형무소 건물에 본부를 차리고 치안업무에 착수했어요.
이튿날 아침에는 본부를 시청으로 옮겼구요. 우선 각서와 소방서의 전화복구를 서둘러 뒤이어 올라온 경찰요원들을 배치하고 시내 곳곳에 방치된 시체와 부서진 건물처리 등 청소작업을 벌였읍니다.
북아현동,각경찰서,광화문네거리,시청지하실,구문화방송국자리등에는 시체가 쌓여있었어요. 북괴는 양민도 많이 학살했지만, 두어 군데는 시한폭탄도 묻고 갔어요.
28일인가 지금의 마포「아파트」근처에서 이것이 터져 미군들이 부상했고,「타워·호텔」부근에서는「지프」가 아주 박살이 났어요. 청소작업과 함께 가장 시급한 것이 식량 배급이었읍니다.
그때 대충 인구 조사를 해보니 서울 잔류시민이 30여만이 에요. 비축미가 전혀 없어 미군한테 구호양곡을 타다가 배급했죠.
향토 방위 대를 조직하고 구 서울동장 등을 그대로 이용해 행정의 협조를 받았읍니다. 전신·전화와 전차 등은 단 시일 내에 복구했어요. 이렇게 치안의 룰을 잡자 남대문과 동대문시장에 저절로 장이 섭디다. 그 두 곳은 역시 시장의 요지인가 봐요. 순찰은 꼭 경찰3인조로 돌게 했어요.
빈집도 많고 허술할 때라 견물생심으로 혹시 엉뚱한 짓을 할까 견제시킨 거지요. 그러나 그때 범죄는 많지 않았고 웬만한 범법자는 훈방했지요. 그때는 경찰들이 대부분 가족과 떨어져있어 간부들이 상하의 구별 없이 조석으로 모여 앉아 할 일을 털어놓고 상의해서 매우 능률적으로 일했읍니다.
또 소년들로 시경음악단을 만들어 각 구 별로 극장서 l주에 1회씩 시민위안연주회도 열었구요.
경찰간부들이 직접 나가 노래도 불렀어요.
이렇게 3개여월을 지내다가 l·4후퇴로 수도를 다시 떠났습니다. 이날 정부요인들은 다 가고 밤늦게 남아있는데 시내 곳곳에서 불이 납디다. 잠복오열들의 소행이지요.』

<공산잔당 70여명을 사살>
▲선우종원씨(당시 치안국 정보 과장·전 정보검사·전 조폐공사사장·현 변호사·중앙선거관리위원·53)『6·25까지 정보부 검사로 사장문제를 다루다가 부산 피난 때 경찰에 투신했어요. 9월27일에 치안국 정보과장으로 2천명의 무장경찰을 LST에 태우고 부산을 떠났어요.29일 아침에 인천에 상륙, 그날 저녁에 서울에 들어왔어요.
환도직후였지요. 그날로 전 조선일보 사옥에 치안 국을 차렸어요. 이날 밤에 화신지하실에 숨어있는 공산잔당 70여명을 포위, 교전 끝에 사살했습니다. 이때 우리경찰도 몇 명 희생됐어요.10월15일께까지는 서울시내에 숨어있는 그들 잔당들을 거의 소탕하고 치안을 확보했지요.』

<금고에 돈 버려둔채 패주>
▲장기영씨(당시 한은 조사부장·현 한국일보사장·55)『9월17일 정부에서는 서울시장에 이기붕씨(고인), 서울시경국장에 이익흥씨, 그리고 시내 각 서장, 보건부 방역국장 등 30여명을 비밀리에 서울행정수복요원으로 임명했어요. 나는 이때 금융기관요원으로 뽑혔어요.
수복요원들은 17일에 조병옥 내무의 일장훈시를 듣고「무초」대사의 전송을 받으며 부산수영비행장을 떠났읍니다.
일본을 거쳐 17일에 김포에 착륙했는데 비행기는「프러펠러」를 끄지 않은 채 우리 일행을 떼밀다시피 내려놓고는 그대로 날아가 버립디다. 미 해병대가 비행장을 탈환한지 얼마 안돼 그만큼 위험했거든요. 20일 미군 대령 한 명이 와서 우리 일행을 인천으로 후송했어요.
그 대령은 인천서 시의 인수 인계 식을 합디다. 나는 즉시 한은 인천 지점을 접수했어요. 지하생활을 하다가 나온 파리한 얼굴의 행원 10여명이 모입디다. 나는 이들에게「그 동안 무엇들하고 있었어」하고 기합을 한바탕 주었습니다. 불쌍한 몰골의 이들을 위로해주면 긴장이 풀려 일을 못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거지요.
괴뢰들은 돈을 모두 금고에 넣어둔 채 그대로 도망쳤어요.
괴뢰들이 그 동안 예금을 받아두었기 때문에 오히려 후퇴 때의 보유잔고 보다 돈이 많아요. 다만 금융단의 여고에서 그들이 한「녹색」치의 돈을 갖고 간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요 나는 부산을 떠날 때 이상덕씨를 책임자로 LST한 척에 돈5억원과 식량 차량 등을 인천으로 보냈는데 그것이 23일에 도착했어요.
금융기관을 개점하고 화폐질서를 잡아야 인심이 안정되니까 정부에서 나를 특파한 것이고, 5억원은 서울의 금융질서를 세우기 위한 급전으로 가져온 거죠. 한데 서울이 예상대로 수복이 안돼요. 영등포에 가서 쌍안경으로 연희고지 쪽을 보니까, 전선이 매일 그대로 교착돼있는 것 같아요.
29일에야「내일 낮 12시에 인천을 출발, 서울로 가라」는 병령을 받고 서둘러 서울로 들어오니까 벌써 이대통령과「맥아더」장군의 환도 식이 끝났어요.
나는 그때 최신형 고급 노란색「머큐리」「세단」을 타고 왔어요.
불타버린 한은 마당에는 직원들이 나왔습디다. 숨어있던 사람도 있고, 괴뢰치하 때 은행 일을 하던 사람도 있어요. 보통 때는 감히 조사부장 근처에도 못 오던 여행원들이 내 손을 붙잡고 울어요. 지금의 제일은행자리로 한은 본부를 옮기고는 행원들에게「지금 은행 일을 도우면 부역한 것은 책임지고 봐준다」고 선언했어요.
금고를 조사했더니, 돈은 거의 그대로 있어요. 하지만 건물이 탈 때 열을 받아 지폐가 못쓰게 됐어요.

<예금 내준다는 벽보 붙여>
그들은 인천서와 마찬가지로 지폐를 가져 갈 겨를이 없었던가 봐요.
30일부터 각 은행의 예금통장을 가지고 오면 예금을 준다는 벽보를 곳곳에 붙였어요. 대금은 배로 실어온 5억원과인천지점서 실어온 것을 썼구요. 5억원은 종전지폐보다 빛깔이 좀 시퍼런 조제지폐였지요. 후퇴 때 대전서 정부는 돈이 7억뿐이어서 급히 일본서 찍어다가 전쟁 중에 썼어요.
이 돈이 한때는 괴뢰가 찍어낸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그들은 가짜지폐는 찍지 않았어요.
10월1일에 조내 무가 와서 치안에 쓸 테니 1천 만원을 빌려달라고 합디다. 내무차관 홍헌표씨의 영수증을 받고 내주었는데 4∼5개월이 지나도 갚질 않아 애먹었읍니다. 10월3일에는 시중은행들도 개정되어 금융 질서라기보다 화폐 질서가 서울서 수복과 동시에 회복된 셈이지요.
29일 충정로의 집에 가서 가족과 상봉, 첫밤을 잤는데 아침에 방공호 속에서 무슨 소리가나 내 호위 경찰인 최 순경이 잡아보니 괴뢰낙오병이에요. 30일에는 건너편 철기 장군댁 마당 숲에서도 2명의 괴뢰 병을 붙잡았구요.』
※정정=본연 제180회 본문 임시국무회의관계기사의 각료 명단 중『이우익 법무(고)』의『(고)』자는 착오로 기인된 것으로 삭제하며, 건재하신 본인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바 입니다.「민족의 증언」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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