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헌선과 안정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리나라의 의회는 두 개의 「알레르기」를 갖고 있다. 「호헌선」과 「안정선」. 이번 5·25 선거의 결과를 놓고 야당이 환호하는 것은 이른바 이 「호헌선」을 확보할 수 있었던 점이다. 「안정선」은 그 후의 일이다.
이것은 바로 한국의회의 구조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역대의 선거들을 회고하면 모든 야당들은·안정선보다는 호헌선에 더 관심과 열의를 쏟았다. 국회의원선거는 곧 개헌선이냐 호헌선이냐의 대결이나 다름이 없었다.
개헌은 어느 경우에나 복잡한 절차를 요구한다. 의회에서는 최소한 재적수의 「3분의2」선에서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 선이 하회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그 선을 넘으려는 편이나 그것을 지키려는 편은 무리한 격전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선 「3분의2」선이란 어느 나라의 의회를 놓고 보아도 「압승」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에서 한 정파의 압승을 기대하는 것은 생리상 어울리지 않는다.
바로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선거에서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잡음과 소란이 뒤따랐던 것은 그 「개헌선 대 호헌선」식의 사고방식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번 5·25 선거는 말하자면 그런 「알레르기」를 하나 해소시킨데도 큰 뜻이 있다. 여야는 헌법을 사이에 놓고 서로 범죄시하는 심리적 불안을 갖지 않아도 좋게됐다. 이것은 어느 편에나 쓸데없는 심리적 부담을 덜어준 의의도 있다.
따라서 하나의 수단으로 전락했던 헌법도 이젠 그 도덕적인 품격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우리나라 국회는 교과서적인 의회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줄 때이다.
전통적인 선진국에선 으례 의회의 안정선이 문제가 된다. 우리도 이젠 그 고도의 의사방법을 도입할 계기가 온 것 같다. 「거수의 장」 아닌 「토론의 장」으로서의 의사를 진행하는 방법 말이다.
그러나 이번 8대 국회의 의석비율은 기술상 상당한 수준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안정선」은 전체의석의 단순과반수만으로 선을 그을수는 없다. 여당의 경우, 의장단(2석)과 상위장(13석중 운위를 제외한 12석)을 제외하면 99석에 불과하다.
이것은 과반수선인 103석에서 4석이나 부족한 수이다. 따라서 상위의 구성은 거의 동수의 비율을 차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당의 행동반경은 심각한 한계에 부닥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의석판도는 도리어 우리의 의회를 이상기류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 야당에 대한 의식적인 분해작용이나 정파의 난무 등이 그런 경우이다.
우리의 의회정치는 이제 『왕도냐, 사도냐』의 새로운 도전 앞에 서게 되었다. 제제다사의 슬기에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