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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제11화>경성제국대학|강성태<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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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학창생활의 낭만>
공부할 때와 놀 때의 구별을 잘했던 당시 학생들은 교수들과 술이나 담배를 같이 할 정도로 자유스러운 생활을 했다.
학생들은 자주 술집에 드나들었는데 비교적 생활수준이 높은 집안출신이 대부분이어서 선술집은 물론 요릿집까지 드나드는 등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이야기를 바꾸어 당시의 술집양상을 잠시 알아보자.
술집은 크게 나눠 선술집·상술집·「카페」나 「바」, 그리고 요릿집 등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드나들던 선술집은 서울시내 곳곳의 길가에 들어가기 쉬운데 마련된 것으로 이것이 변형되어 현재의 대폿집·통술 집으로 되었다.
당시에는 주인과 작부 비슷한 주모가 가마솥을 걸어놓고 약주·탁주 등 싼 술을 양푼에 퍼서 가마솥의 끓른 물에 한두 번 휘저어 덥게 만들어 내주었다.
「홀」안에 앉는 곳은 전혀 없었고 손님들은 술을 받아 땅바닥에 서서 마셨다.
요즘의 「칵테일·파티」양식과 비슷했다.
큰 사발잔 한잔에 안주를 섞어 5전씩이었는데 술에 따라 잔 크기가 조금씩 다르고 안주도 비싼 것은 분량을 적게 주었을 뿐 일률적으로 술과 안주가 5전이었다.
술과 안주를 따로 청할 때는 술 두잔에 5전, 안주 2개에 5전 등으로 셈했다.
이곳을 드나드는 계층은 지게꾼·인력거꾼 등 육체 노동자가 대부분이었고 술을 좋아하는·신사 층과 학생들도 간혹 드나들었다.
선술집은 서민적 분위기와 함께 신선한 야채·생선 등 계절적인 음식을 가장 빨리 갖추어 놓는 곳으로 유명해서 새로 나온 음식을 먹기 위해 가는 이도 많았다.
운동하고 나서 단체로 몰려가 혼자서 술 열 잔에 안주 43개를 먹어 손님들을 놀라게 한 기억도 난다.
1원만 가지면 여러 명이 어울려 마실 수 있었다.
상술 집은 양반의 집. 과부가 얼굴은 내밀지 않고 여러 명의 작부를 내세워 장사하는 집이라고 해서 일명 내외주점이라고 불렸다.
이것도 서울시내·곳곳에 있었는데 별로 좋지 않은 기와집 방에 술상을 놓고 머리 댕기를 길게드린 작부를 데리고 노는 집이었다.
술은 주로 약주와 정종이었고 20여가지 안주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놓이고 술 한 주전자가 끼여 기본 요금이 50전∼1원이었다.
한 주전자의 술을 다 마시면 다음부터는 술 주전자가 들어올 때마다 안주 한 개씩이 끼여 들어와 역시 50전∼1원씩의 추가요금을 받는데 한번씩 들어오는 것을 1순배, 2순배라고, 말한다.
기본 상에는 안주가 가지 수만 많을 뿐 별로 신통치 않으나 다음부터는 먹을만한 것을 시키는 대로 가져왔다.
작부는 대체로 손님보다는 적게 들어오며 수단 좋은 손님들은 밤새워 마시며 작부와 재미를 보기도 했다.
이곳은 대학생보다는 중년층의 주객들이 역시 많았다. 「바」나 「카페」는 역사가 비교적 짧은(50여년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식주점으로 양복이나 입고 다니는 신식청년이 많이 드나들었고 대학생들도 애용했다.
「카페」에는 「모던」한 여급이 있어 노래를 불렀는데 한국인여급들은 한복이나 양장, 일인여급들은「기모노」차림이나 양장을 입었다. 종로 2가에 있던 낙원 같은 콘「카페」에는 60∼70명의 여급이 있었다. 밴드가 생기고 전속가수가 노래하던 것은 30년대부터인 것으로 기억된다.
「카페」에서는 주로 정종과 맥주를 팔았으나 「바」에서는 주로 양주를 팔았다.
「카페」보다는 훨씬 좁은 홀에서 조용히 마시며 친구나 주인「마담」과 잡담하는 분위기였으며 여급은 한집에 3∼4명씩 있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장년과 노년층의 손님이 많았다.
통금이 없던 때라 폐점시간인12시가 지나도 마실 수는 있었다.
식료품 점에서는 맥주 한 병에 35∼40전 했을 때「카페」에서는60전씩 받았고 정종은 한 홉에18전∼20전이었다.
3, 4명이 가서 맥주10병정도 마시고 나머지 3원 정도는 팁으로 주곤 했다. 팁은 요즘처럼 개인적으로 주는 예도 있었으나 계산에 포함해서 몰아주는 것이 상례였다.
개인적으로 줄 때는 1원∼2원을 주었다.
여급의 손 정도를 만지는 이상의 난잡한 행위는 거의 없어 분위기가 요즘의 「비어·홀」이 보다 훨씬 좋았다.
서울에는 명월관·국일관·식도원·천향원 등 일류 요릿집이 있어 부유층이 주로 드나들었으나 여유 있는 대학생들이 가끔 드나들었다.
요즘 학생들은 이름난 요릿집의 출입이「터부」로 되어있고 가격도 비싸 졸업 때까지 한번도 가보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당시에는 요릿집 값이 요즘보다 비교적 헐했고 대학생들의 반경도가 처자를 거느린 어른이고 보면 가끔 출입할 기회가 생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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