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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아버지 혼을 빌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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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

요즘 중국의 최고 스타는 시중쉰(習仲勳·1913~2002)이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아버지로 공산혁명 8대 원로 중 한 명이며 부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모든 언론이 나서 시중쉰 배우기를 독려하고 있다. 지금까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그가 갑자기 부상하는 걸 두고 시 주석을 의식한 ‘용비어천가’라는 말도 나온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 보면 시진핑의 정교한 통치 방정식이 숨어 있다.

 우선 ‘반개혁’ 세력에 대한 경고다. 최근 관영 중앙TV(CC-TV)가 제작해 방영한 시중쉰 회고 6부작 내용의 핵심은 개혁정신이다. 특히 1980년대 초반 광둥성 서기로 근무하면서 개혁·개방을 주도했던 그의 업적이 집중 부각됐다. 79년 덩샤오핑에게 광둥 지역에 경제특구를 설치할 것을 처음으로 제안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말하자면 개혁·개방은 덩이 설계했지만 기초를 다지고 공사를 한 이는 시중쉰이라는 거다. 시중쉰의 개혁정신에 덩샤오핑의 카리스마를 얹어 개혁 저항을 차단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이다.

 권력 장악에 대한 선언적 의미도 크다. 지난 15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시중쉰 추도 좌담회에는 시 주석 자신이 직접 참석해 부친의 업적을 기렸다. 이날 시중쉰의 업적보고는 권력서열 3위인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장(국회의장 격)이 했다. 최고권력이 최고권력의 부친을 찬양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음날 CC-TV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까지 나서 시중쉰을 입이 닳도록 칭송했다. 80년대 후반 당 중앙에서 시중쉰과 근무하면서 겪은 그의 능력과 개혁성, 자상함에 대한 회고였다. 전직 총리가 후임 국가주석의 부친의 업적을 거론하고 찬양하는 일 역시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시진핑의 권력이 탄탄하다는 시사다.

 부패혐의로 실각한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시 서기를 지지하는 극좌세력도 겨냥하고 있다. 여기에는 오래된 두 가문의 구원(舊怨)이 존재한다. 보 전 서기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1908~2007) 역시 혁명원로로 부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보이보와 시중쉰은 이념적 동질성을 공유하지 못했다. 시가 정치개혁의 상징인 후야오방(胡耀邦·1915~89) 전 당총서기 노선을 적극 지지한 반면 보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며 후의 실각을 주도하기까지 했다. 훗날 시는 보이보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따라서 시중쉰 부각은 보이보의 이념적 패배를 선언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 좌파의 ‘평등 중시’ 개혁보다는 우파의 ‘경쟁과 시장 중시’ 개혁을 택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중쉰 추도식에 후야오방의 아들 후더핑(胡德平)이 참석해 후야오방의 부활을 예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진핑은 지금 죽은 아버지 혼까지 빌려 권력을 다지고 개혁을 벼르고 있다.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