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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40)<제10화>양식 복장(7)-이승만(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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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젠틀맨」의 정석>
우리 나라에서 맨 먼저 「모던」한 차림의 양복 치레를 한 사람은 구한 말 예식 과장이던 고희성,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윤기익, 미국에 8년이나 머무르다 온 이상필-이 세 사람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들 세 사람에 앞서서 양복을 입은 인사가 없는 바는 아니다. 우리에게 양복다운 양복, 즉 평상복이 받아들여진 경향을 살펴보면 서구 계와 미국 계 그리고 일본의 절충식 등으로 대별 할 수 있다. 또한 그 도입 경로를 볼 때 서구 계통의 양복은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여행과 주로 그곳에 유학 갔던 이들이 주축이 되었고, 미국 계통은 대차 없겠으나 「미션」계통의 관계인사들이 끼친 영향이 클 것이다.
일본을 통해 온 것은 그들이 이 땅에 많이 왔으므로 직접 보여준 것도 있겠으나 망명객과 유학생들의 영향이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이때에 해외를 두루 돌아다닌 사람은 파계 유길준을 첫 손 꼽을 수 있다. 그는 1881년에 신사 유람단의 일원으로 뽑혀 첫 해외 유학생이 되는 기회를 가졌고 또 2년 뒤에는 미국에 가는 보빙사를 따라갔다가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유럽」을 거쳐 1905년에 귀국했다.
그의 이 같은 외유로 『서유견문』을 써서 소개했는데 아마 이 무렵에 찍었을 것으로 보이는 청년 유길준의 사진은 「싱글」의 양복장이이다.
구한말의 기록에서 누가 어떠한 양복을 입었는지 구체적인 것을 찾아보긴 어렵지만 1895년에 김홍집 내각을 쓰러뜨리려 궁궐을 침범했던 춘생문 사건의 조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박총 이라는 인물은 본래부터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일인이라 가칭할 정도로 행색이 수상하더니….』
또 내가 알기로는 을사년(1905년) 일본과의 조약에 비분하여 자결한 민영환 선생도 신식 양복장이의 한 분이다.
그가 외유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일어난 일인데 그를 자결케 한 것은 보호조약이란 미명하의 망국적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엔 문명된 구미 각 국과 비교하여 자국의 꼴이 너무 비관스러웠던데도 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민 충정공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안국동 네거리에 세운 그의 동상은 양복을 입은 모습으로 해야 옳다. 당시의 고관 제복은 번쩍번쩍하는 금사로 무늬 놓은 「밴드·칼러」의 대례복이다. 물론 당시 일본 것과 같다는 점에서 옛 관복을 택했는지 모르지만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그 제복은 「프랑스」식인 것이다.
민 충정공이 돌아가신 후에 그의 대례복 차림의 사진과 혈죽 도를 넣은 사기필통이 학생들 사이에 대 유행이었다. 또 신채호 선생이 쓴 「유년필독」이란 교과서에도 마찬가지 그림이 실려 젊은이들에게 경고와 각성을 촉구했다.
이와 같이 앞서 적잖은 양복장이가 있었음에도 고·윤·이 세 사람을 평상복의 효시로 드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적어도 시대의 첨단을 걸었을 뿐 아니라 촌티를 벗은 멋쟁이라는 점에서 그 3인을 정석으로 치는 것이다.
고희성씨는 나의 왕고모의 둘째 아들로 왕고모 부는 도지부 대신 고영희 씨이다. 고희성씨는 나보다 30여세 연장으로 비록 외국에는 안 갔었지만 궁내부 예식과장(지금의 의전실장)이라서 해외 문물을 빨리 익힐 수 있었고, 또 내내 양복을 입고 외국인 관계 연회에 참석한 까닭에 세련된 옷차림이었다.
그는 장안에서 맨 처음 자전거를 선보인 사람이요. 인력거를 가지기도 첫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한결 널리 알려져 있다. 통 고무 바퀴에 「핸들」이 크고 벌어진, 그런 엉성한 자전거인데도 두 바퀴로 굴러가는 것이 하도 신기하여 『마술 차가 간다』고 했다. 아마 지금 비행기에 견줄만할 것 같다.
그의 직책이 기생과 밀접하여 그때의 관기 72명한테는 특히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남봉」이었는데 진주 출신 기생을 소실로 삼고 있다가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윤기익 씨는 고희성 씨와 단짝인 동갑네였다. 그는 구미 인이 우리 나라의 지하 자연을 욕심 내어 금광을 찾으러 몰려들 초기에 그들 외국인을 잡은 첫 행운아이다. 나중에는 그 자신이 직접 금광을 경영해 장안에 노다지를 뿌리기도 했다.
그의 얼굴은 길지도 둥글지도 않은, 말하자면 잘 생긴 인물로 그의 「싱글」차림이 얼마나 「스마트」하고 세련됐는지 서양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는 고희성 씨와 함께 사냥총을 메고 자전거로 달리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세칭 「금 망아지 아들」로 불리던 이상필 씨는 서대문 밖의 「맨퍼드」상회 주인이다. 미국에서 8년 간 유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외국인 상대의 잡화상을 일찍부터 열어 한국 제일의 「하이칼라」상점으로 지목돼 있었다. 그를 「금 망아지 아들」이라 부른 것은 그의 부친이 금을 바치고 양주 목사가 됐다는 소문 때문이다.
키는 보통이나 단아한 풍모였다. 조금도 교만한데가 없이 「데모크라시」한 생활을 했다. 그림 그리는 청년들을 초대해 1주일에 한번씩 원유 회를 베풀었고 노 시객(한시와 시조) 들을 위하여 사랑채의 한방을 내어놓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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