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죽음의 상자' 깨는 큰 그림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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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동북아 중심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동북아의 화약고다. 휴전선을 마주 보고 수십만의 정규군이 중무장으로 대치하고 있는 곳은 한반도 말고는 없다. 특히 2천1백만 인구가 밀집해 있는 서울 수도권은 미국 군사전략가들 사이에서 '죽음의 상자(kill box)'로 불린다.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시샘이라도 하듯 지난 주말 실로 상상조차 하기 싫은 한반도 전쟁 시나리오가 미국 유력신문들에 실렸다.

북한 핵시설에 대한 미국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될 경우 북한은 1만3천여포로 한시간 안에 40만~50만개의 포탄을 쏟아부으며 한국의 수도권을 초토화하고, 신경가스를 장착한 미사일 50기로 1천2백만 서울시민의 38%를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끔찍한 추산이다.

상자 속에 갇혀 꼼짝없이 죽음을 당한다는 뜻에서의 '죽음의 상자'다. 전쟁은 한.미 양국이 결국 이기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라크와의 전쟁보다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때문에 미 군사전략가들도 한국에서의 전쟁은 '군부의 악몽'이라며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북한 핵 해결을 위한 군사행동은 가능한 선택방안으로 갈수록 무게가 실리는 분위기다.

우리 입장에서 전쟁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고 노무현 대통령도 3.1절 기념사에서 "그 엄청난 재앙은 감당할 수 없다"며 평화적 해결을 거듭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그 구체적인 방법이다.

북한 핵도, 전쟁도 안된다면 해결방법은 대화밖에 없다. 문제는 미국이 다자간 틀 속에서의 북한과의 대화를 얘기하면서도 그 틀은 여태 만들어지지 않고 있고, 또 외교적 해결을 누누이 강조하면서도 실제 외교는 하지 않으며 갈 데까지 가보라는 식의 '김정일 내버려두기'로 임하고 있는 데 있다.

뉴욕 타임스의 한 칼럼은 미국 강경파들이 한국의 동의 없이 마지막 수단으로 북한에 대한 선별.족집게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며 한국과 일본이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부시 행정부가 군사행동을 결행할 만큼 비이성적이진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오산이라고 우리에게 도리어 경고한다.

미래의 동북아 중심이 여차하면 '죽음의 상자'가 될 수도 있다는 시사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취임 축포'정도의 우스개로 받아들여지고, 영변 핵시설 재가동을 두고 '예정된 수순'이며 '아직 위험선(재처리 가동)은 넘지 않았다'는 식의 일부 당국자의 인식은 너무도 안이하다. 무력사용도, 제재도 안된다면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케 해 한반도의 비핵화를 실현시킬 수 있는 우리의 전략과 복안은 무엇인가.

동북아의 중심이 되려면 한반도에 먼저 평화가 정착돼야 한다. 한.미동맹의 재편은 한반도의 평화정착 과정은 물론 통일과정과 통일 이후 이 지역 역학관계까지도 고려에 넣어야 하는 국가 장기 전략과제다.

특히 주한미군 감축과 재배치는 북한군 병력의 후방 이동 및 감축과 연계시켜 추진해야 한다. 명분과 자존심보다 차분하고 장기적인 큰 그림이 앞서야 한다. 독일이 통일 이후 10년이 넘도록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고 있는 이유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한.미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 관계다. 스스로 힘을 길러 대등해질 때까지는 불평등 관계 속에서 우리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실리외교다. 외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안보'라고 한다.

지난주 매경 인터넷 설문조사에서 37.6%가 북핵문제 해결과 한.미관계 개선을 최우선 국정과제(경제개혁은 17.8%로 그 다음)로 꼽을 정도로 국민의 안보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국내정책이 잘못되면 국민의 좌절로 끝나지만 외교정책이 잘못되면 국민을 죽일 수 있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명언을 노무현 정부는 깊이 새겨야 한다.

변상근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