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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제자는 필자>|<제9화>우정 80년 (9)|강직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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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배달부>
『이집 저집 다니면서 편지요. 전보요. 먼데 소식 전해주는 고마운 아저씨. 가방 메고 이곳 저곳 수고하며 다니네. 집집마다 문패 달고 기쁜 소식 기다리자. 』 우체부 아저씨라는 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체부는 먼데 소식 전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지만 구 한국 시대에는 설움도 많았다. 구 한국 시대 체전부는 하인들이 쓰는 벙거지를 쓰고 다녔다.
이 벙거지가 설움 받은 꼬투리가 된 것이다. 「독립 신문」은 논설을 통해 체전부들의 지위 향상를 역설하기도 했다.
이 무렵 독립 신문 논설에 나온 체전부들의 설움을 살펴보면 『…양반 칭호 하는 사람들은 체전부를 자기 집 문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하고 자기 하인을 시켜 서신을 받아들이며 혹 체전부가 양반의 집 사랑에 들어간 즉 양반이 가라사대 아무리 개화한 세상이기로 벙거지 쓴 놈이 무엄하게 방에 들어오니 그럴 법이 있으랴하면서 자기 집 하인을 불러 이놈 잡아내려 문 밖으로 쫓아내라 하며 이놈 저놈 호령하고 그 괄시와 멸시가 비할 곳 없으니 일향 이러할진대 체전부 노릇 할 사람이 없을지라…』
이 당시 체전부들이 또한 애 먹은 것은 지금처럼 주소가 구분되어 있지도 않았고 문패에 이름 대신 호를 붙였을 뿐 아니라 편지를 받을 사람을 제대로 적지 않은 때문이기도 했다. 「안동 부사 개탁」은 안동에 부사가 여럿 있을리 없고 「대구부 비서과 이학관 여차소입납」 은 비서과에 이학관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도 뒷면에 친절하게도 「티구부 (대구) 비서과에 가셔 리학관 나리께 드리라」고 한글로 써서 더욱 쉬웠다. 그러나 「중관 대궐 전좌 포도청 행낭후곡 제삼와가 서향대문 김주사 댁 입납」같은 것은 주위 지형이 까다롭다든가 편지를 쓴 사람이 정확하게 적지 않을 경우 잘못 배달되기 안성마춤이었다.
실제로 김 주사에게 보내는 이 편지 (1898년3월16일) 는 김 주사 집이 제3가가 아니라 제4가였기 때문에 잘못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 우리 나라는 번지라는 것이 없었고, 통 호로 표시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초창기 우리 나라 체전부의 의관을 살펴보면 또한 재미있다.
물론 우체사가 있는 곳의 체전부들은 양복으로 된 정복을 입었지만 지방에 있는 우편소 체전부들은 짧은 두루마기에 벙거지를 썼고, 입에다 장죽을 물고 다니기도 했다. 벙거지 대진 대나무로 만든 패랭이를 쓰기도 했으며 신발은 미투리를 신고 있었다.
체전부들의 가방은 처음에는 목면으로 만든 것이었고 마직류 가죽 등으로 해왔다. 초창기에 체전부가 된 사람은 군노나 역졸의 후예들이 많았는데 특히 동 주인·면 주인·군 주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활약이 컸다. 동리나 면·군에서 사환으로 오래 근무한 이들은 동네 구석구석을 잘 알았기 때문에 체전부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이들이 대거 체전부로 들어오고 그 동네 사정을 손바닥 보듯이 환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흔히 동·면·군 주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또 한가지 기억 나는 것은 시골 체전부들은 편지를 긴 대나무 가지에 끼워 가지고 다녔던 사실이다. 요즘 「쇼·윈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긴 대나무를 여러 갈래로 쪼개고 편지를 그 틈 사이에 끼워들고 다니던 그 당시 체전부들의 모습은 특이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체전부들에게 아랫 동네로 가는 청첩장이나 부고를 부탁하기도 했고 편지와 우표 요금을 맡기면 이들이 어김없이 우표를 사서 붙이기도 했으니 퍽 양심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청첩을 전달할 때는 대나무에 보자기를 씌워 사람들이 윗동네에 경사가 있음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체전부가 될 수 있는 자격으로 이들 주인 칭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 동네 지리와 인심을 잘 아는 것 외에 한글과 한문을 웬만큼 알아야 했다.
체전부들의 월급은 처음에는 쌀·광목·신발 등으로 주었는데 쌀은 대개 l개월에 3말∼5말 정도였다. 그 뒤에는 호봉 (3급)이 7원, 2급이 8원,·l급이 9원 정도였다. 진주 박명준씨 같은 사람은 면 주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훗날 집배원 감독까지 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주인들은 한글과 한문을 조금씩 했기 때문에 문맹이 많았던 그때인 만큼 가끔 편지를 대신 읽어주면서 같이 울어주고 웃어주기도 했고 때로는 답장을 써 주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우체사에서는 주판 대신 죽산을 썼다. 죽산이라는 것은 길이 15cm쯤 되는 대나무를 가지고 셈하는 것이었다. 다섯개가 되면 옆으로 하나 놓고 10개가되면 다시 옆에 하나 세워놓는 셈 법이었다. 이것은 1915년께 까지 써온 것으로 기억한다.
이처럼 체전부들은 어떤 때는 괄시를 받기도 했지만, 또 어떤 때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애환을 함께 해오는 동안 인심도 많이 각박해져 그 후 전하라는 편지를 전하지 않고 강물에 띄워 보낸다든가 송금을 가로채는 집배원이 한 두 사람 생겨 전체 집배원들에게 누명을 끼치고도 했다.
그러나 얼마 전 우편 배달 중에 남은 3통을 전해 달라면서 숨을 거둔 연무대 우체국 장두량씨, 하루 평균 80리를 다니며 16명 식구를 부양하며 쉬는 날에는 이발 기구를 갖고 머리를 깎아주고 극빈한 두메 환자에게 간단한 약을 전해준 충북 단양 우체국 홍해기씨 등의 이야기는 고맙고 또 고마운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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