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저 땅에 씨를 뿌려야|귀농의 꿈 부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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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서부전선=오만진기자】 『버려 두었던 저 땅에도 씨를 뿌려야지.』 서부전선 방위임무를 한국군이 맡게 되자 미군철수로 한때나마 실의에 잠겼던 기지촌 실향주민들은 임진강북쪽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영농기대에 부풀어 있다. 최근 미 제2사단으로부터 이지역 작전 권을 이양, 이미 철통같은 방위임무에 들어간 우리 국군 ○사단의 전방 OP에 오르면 북한 땅 개성 송악산이 멀리 보이는 임진벌. 6·25동란이후 갈대만이 우거진 논과 밭들은 황무지화,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실향 귀농민들이 『언젠가는 돌아가 다시 씨뿌릴 날이 올 것 』이라는 기대 속에 전후 20여 년간 버려져 왔었다. 경기도 파주군 일대에 깔려 있는 귀농민들의 오랜 숙원은 막연한 것만은 아닌 성싶다.
이 지역 방위를 맡은 국군 ○사단의 한 지휘관은 『임진강 건너 남방한계선 이남의 경작가능지역에 연고권을 가진 귀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군에서 주선해불 계획』이라고 말했다.
파주군 적성면 장파리에서 바를 경영해 오다 미군 철수이후 이삿짐을 꾸렸던 농민 김모씨(43)는 『눈앞에 버려뒀던 내 땅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었다』면서 『농사를 짓게 되면 오죽이나 좋겠느냐』고 가슴 부풀어 있었다. 그는 잠겼던 가게를 농기구상으로 뜯어고칠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저 갈대밭을 보십시오. 지금은 산토끼·노루 등 들짐승들이 우글거리는 땅이지만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 마지기(2백 평)에서 벼 석 섬씩은 문제없이 거둬들였던 기름진 농토였지.』 임진강을 가로지른 리비교 옆에서 세탁소를 경영해 온 한모씨(46)는 『강 건너에 버려 둔 4천여 평의 논에 다시 모를 꽂을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 뿌듯해진다』면서 『가능하면 올벼 농사부터 짓게 돼야 할텐데…』하고 옛날을 되새겼다.
이곳 귀농민들은 당국의 허가가 나는 대로 당장 경작 가능한 농지면적을 1천2백여 정보로, 귀농민을 1천여 가구로 어림 잡았다.
이 땅에 씨를 뿌리면 연간 2만 5천여 섬의 쌀과 잡곡을 거둬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기지촌 주민들은 한 발짝 다가선 강 건너 옥토에서의 영농과 함께 이 지역 방위를 국군이 맡은 데 대해 『이젠 마음놓고 잠잘 수 있게 됐다.』면서 다시없이 든든하다고 했다.
이들은 미군이 주둔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다소 혜택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휴전선 부근의 농민들과 같이 농사를 짓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지난 68년 1.21사태 때 31명의 무장공비들이 침투한 것을 비롯, 북괴의 도발행위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잦았었다.
『우리국군은 이 선에서 한 발짝의 후퇴도 있을 수 없으며 철통같은 우리 경비망엔 한 놈의 간첩도 빠져나갈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이학봉 부사단장은, 군과 당국의 협조아래 이 지역주민들의 생계 대책에도 최선을 다해 후방 못지 않은 평화로운 고장을 만들겠다고 앞으로의 계획을 펼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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