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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제자는 필자|<제8화>황성기독연회(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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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창립의 동기>
【편집자주】필자 전택부씨는 현YMCA총무로 57년부터 YMCA에 재직하고있으며 일제 때인 40년대부터 기독청년회와 관계를 맺고 초창기 「멤버」들과 교류를 가졌다.
우리 나라에 YMCA가 창설되기는 1903년10월28일 이라. 지금은 YMCA라야 통하지만 처음에는 청년회 또는 황성기독교청년회라고 해야 알았다. YMCA가 지금은 종로2가 한 길가에 서있는데 창설 당시에는 그 뒤쪽에 있는 현 감리교중앙교회 자리에 있었다. 헌종의 후궁으로서 순화궁 김씨가 살던 태화궁이라는 고궁이 지금의 태화 기독교사회관 자리에 있었고, 지금의 중앙교회자리에는 태화궁의 부속건물인 사랑채가 있었다.
그 후 태화궁의 본 궁에는 이완용씨가 역적으로 몰려 그 집이 방화되어 타버리자 고종이 불쌍히 여겨 임시 와서 살게 하였고 그 사랑채에는 나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거의 비다 시피 하니까 고종의 호의로 거저 쓸 수 있었다.
고종의 이야기가 났으니까 말이지 고종은 처음부터 선교사들을 좋아했다.
즉1885년 알렌(안련=세브란스병원의 창설자)이라고 하는 최초의 의료선교사룔 자기의 시의로 삼았고, 1895년에 민비가 왜놈들에게 살해되자 고종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다가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초창기에는 상류층 인사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었다. 다만 갓장이, 망건장이, 땜장이, 대장장이, 붓장이, 돌장이, 옹기장이, 노점장이, 미장이, 온돌장이, 숯장이 같은 천민들만을 상종할 수 있었다.
예수교신자를 「예수장이」라고 부르게된 직접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둘째로 예수교가 일단 한 동네에 들어가면 옴장이, 펫병장이, 콜록장이, 헌디장이, 매독장이 같은 전염병처럼 쫘악 퍼져서 말하자면 한 문중이 아주 질만이 나니까 아마 예수교 신자는 천주악장인가보다 했던 것이며, 세째로 선교사들은 오자마자 병원을 차리고 무슨 약을 먹이고 사진을 찍고 수술을 하고 하는 것이 다 요술장이, 침장이, 뜸장이, 거짓말장이, 깍정이, 나팔장이, 바람장이, 풍각장이 같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초창기 기독교 신자들은 거의 전부가 천민들이었다. 선교사들 역시 직접 벽돌장이 노릇도 하고 미장이, 대장장이, 침장이, 기와장이 같은 천한 일을 곧잘 하니까 일반 지식인들이나 상류사회 인사들은 일체 선교사들과 상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장이를 천주악장이라고 하면서 꺼려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의 교회는 천민들로만 가득 차게되었다. 초창기 남대문교회의 별명을 부인교회라고 했는데 그 교회에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를 받고 나온 부인들이 많이 신자가 되어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시시한 사람들만 모인다고 해서 썩을 부자 부인교회라고도 했다. 지금도 남대문 교회에는 부인들의 세력이 크다.
승동교회 첩장이 교회라고 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첩살이를 하는 부인들과 불쌍한 과부와 백정패들이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연 모여 앉으면 남의 집 비밀 이야기나 하고 성궁질을 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서울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를 가면 서울 장안의 모를 소식이 없이 되었다. 근래서 「인포메이션·센터」즉 첩장교회라고도 했다.
이와 같이 서울장안의 교회는 전부 천민들로만 가득 찼다. 그대서 상류층 인사들은 예수를 믿고 싶어도 사실상 갈 곳이 없었다. 이것이 선교사들이 YMCA를 창설하게된 직접적인 동기다. 다시 말하면 교회와는 조금 성격이 다른 기관을 새로이 만들지 않고서는 지식인들과 양반들의 자제를 신자로 포섭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 1905년 을사조약이 채결되자 군대가 해산되고 청년들은 갈곳이 없었다. 그 중에는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고, 해외로 망명가는 청년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는 상류 가문의 청년들은 자포자기하여 주색에 골몰하고 신세를 망치는 수가 많았다.
이런 만국이라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두 선교사는 1899년부터 YMCA를 설립해 줄 것을 YMCA 국제 위원회에 청원했으며, 1900년에 가서는 상해에 주재해있던 라이언이라고 하는 동양 순회 총무가 와서 조사를 하게 하고 1901년에는 질레트(길례태)라고 하는 미국 「예일」대학출신의 유능한 청년을 YMCA 조직간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 오는 즉시로YMCA를 조직하려고 애썼다. 하나 독립협회 때부터 청년들 때문에 혼이 난 고종은 몹시 꺼려했기 때문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1903년10윌28일을 기하여 창립총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해아밀사 사건 때 황제의 밀사로 갔던 저 유명한 헐버트씨가 사회를 하고 한. 미·영·일·중 5개국국민으로 구성된 28명의 창립회원이 모여서 황성 기독교 청년회를 창설했던 것이다.
그리고 1904년 초에는 격식대로 이사회를 조직하였는데 초대회장에는 게일(기일)씨이고, 초대총무는 전기한 질레트(길례태)씨였다. 그후 곧 김정식씨가 부총무 즉 한국인총무가 되었다. 【오리 전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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