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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하지 못할까 봐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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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호 28면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Sidonie-Gabrielle Colette, 1873~1954) 콜레트는 사랑으로 인한 기쁨과 괴로움을 소설로 표현했다. 특히 냄새·맛·촉각·색깔의 감각적 묘사가 탁월했고, 근친상간적 애정 등 금기시된 여성의 욕망을 참신한 시선으로 그려낸 것으로도 화제가 됐다. 아버지의 파산, 유명한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통, 벨 에포크 시대 물랭루주의 팬터마임 배우라는 명성, 서른 살 어린 양아들과의 스캔들, 세 번의 결혼, 그리고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훈 등 파란만장한 삶을 누렸던 그는 팔레루아얄 아파트에서 고양이들에게 둘러싸여 전설적인 생을 마감했다.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19세기 빅토르 위고 때처럼 많은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이해해 주겠지? 이제 30년 동안 지겹도록 나를 괴롭혔던 그놈의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프면 그냥 슬프고 기쁘면 그냥 기쁘고 그렇게 살려고 해. 요즘은 그래. 근사한 일이지. 너무 근사해. 하지만…근데 말이야. 산모들은 해산 후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자다가도 아이 울음소리에는 반사적으로 벌떡 깨곤 하거든… 우습지, 아직도 사랑에 대해 반사적으로 행동하게 되나 봐. 사랑을 거부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사랑을 마다하지 않거든, 비알.”

강신주의 감정수업 <44> 겁

방금 읽은 것은 1928년 출간돼 영화로도 인기를 끈 『여명(La Naissance du jour)』의 작가 콜레트의 서글픈 체험이 그대로 묻어 있는 자전소설의 일부분이다. 불혹의 나이 마흔을 넘은 여인은 사랑에서 해탈하고자 한다. 몇 번 이혼한 경험이 있는 그녀로서는 사랑이란 정말로 매력적이지만 끔찍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아름다움을 무화시키며 절정에 이르렀다가 비바람에 떨어져 무심한 인파에 짓밟히는 꽃처럼 사랑도 그렇게 퇴락을 맞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그녀는 “데어봐야 뜨거움을 안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녀에게 30대 중반의 남자 비알이 사랑으로 다가오려고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질 수밖에 없는 꽃과 같은 사랑을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의 뜨거움에 델 만큼 데었기에, 여기서 사랑의 꽃이 개화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콜레트, 그리고 작중의 화자 ‘나’는 사랑의 싹을 자르기로 한다. 이런 결정에 이르도록 만든 그녀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스피노자라면 그것을 겁, 혹은 겁남의 감정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겁남(pusillanimitas)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에티카』중)

그렇다. 그녀는 비알과 사랑을 불태우고 싶었다. 비알과 나이 차이도 있고, 그에게는 그를 몹시도 사랑하는 클레망이라는 20대의 파릇파릇한 여자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녀는 비알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정직한 욕망이었다. “윗도리를 벗은 채 약간 흥분해 있는 이 청년에게서 사랑의 밤을 느끼게 하는 향내를 맡았던” 것, 이것만큼 그녀의 욕망을 명료하게 보여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겁이 났던 것이다. 또 뜨거운 사랑에 온몸과 마음이 데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가 비알을 떼어내려고 선택한 전략은 사랑에 초탈한 제스처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고,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죽고 싶어.” 전 남편 중 한 사람이 했던 말을 그녀는 반복하고 있다. 소설을 쓰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당신은 사랑이나 불륜, 약간은 근친상간적인 애정 관계, 결별 같은 것들을 다루지 않는 책을 쓸 수는 없소? 인생에서 그것들 말고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요?”

그렇지만 사랑은 누군가를 통해 내가 완전해지고 있다는 축복과도 같은 감정 아닌가. 그러니 모든 사람들은 사랑에 그토록 목숨을 거는 것 아닌가.

비알은 그래서 성숙하지 못했던 남자였다. 그녀가 사랑에 너무나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녀에게 그 이상의 희망과 용기를 주었어야만 했다. 겁먹은 사람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그는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차례 이별을 경험했다고 해서 용기나 성숙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다. 우리는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 아직도 아물지 않는 흉터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고, 사랑이란 것과 무관하게 죽고 싶어.” 그녀의 이 말은 사랑이 무섭다는 것이지, 사랑을 저주한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채로 살고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건 그녀도 알고, 동시에 그도 알았던 것 아닐까?

사랑에 겁을 내고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부터 초탈한 사람이라고 비알이 착각했던 것, 수많은 경험을 통해 그녀가 엄청 성숙한 여인이라고 비알이 믿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그녀에게 너무나 비극적인 일 아니었을까? 사실 그녀는 비알에게 자신의 겁마저도 품어 줄 너른 가슴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수녀나 비구니와 같은 삶을 선택한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그녀의 소원대로 그녀는 비알과 헤어진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사랑과 무관한 삶” 즉 사랑으로부터 해탈한 삶이 도래할까? 결코 그렇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여전히 비알을 그리워하고 있다. “나 역시 감상적으로 비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리울 뿐이다. 그렇다. 나는 그가 그립다. 그가 조금 덜 그리워질 때쯤이면 그에 대해 더 근사하게 과장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지도 모른다. 사랑으로부터의 해탈, 그것은 오직 마지막 숨을 내뱉은 뒤에나 가능할 뿐이니까.



대중철학자.『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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