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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초년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나는 적은 용돈 정도의 월급을 받는 가계 점원이다. 직장 생활에 익숙지 못한 내가 그럭저럭 몇 달을 지내고 난 어느 날 저녁 무렵의 일이다. 예쁘고도 날씬하며 세련된 아가씨들이 와서 물건을 흥정했다. 돈 2천원을 주었다 뺏었다하며 물건의 종목이 틀리다며 다시 풀었다가 그 종목의 대리 품으로 쓰겠다고 다시 쌌다가 다시 푸는 동안 전표도 몇 장 떼어주고 손님과 얘기도 주고받는 순간에 착각을 일으켰던 것 같다.
혼돈 된 정신을 되찾았을 때에는 이미 그 예쁜 아가씨들에게 「네다바이」를 당한 뒤였다. 주인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 아가씨들이 다시 다음 가게로 가서 그런 짓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에 찾아 나섰다. 그 추운 날 밤에…서울 인심과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몰랐던 나를 비웃듯 그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서울」이라는 소리를 오늘에서야 실감했던 것이다.
말없이 자리를 비운 나를 직장에서는 수상히 여길텐데 이제 서야 「네다바이」 당했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게 그런 돈이 있을 수도 없는 처지고하여 뭐라고 변명을 하면 좋을지 정말 난처하여 나는 문 앞에 그대로 서서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글썽하여 울고 서 있는 나를 보고 이웃에서 가게를 하시는 아저씨가 왜 그러느냐고 물으셨다. 내 얘기를 듣자 그 아저씨는 선뜻 2천원을 내어주시며 『월급을 타서 갚으라』고 하셨다. 나를 안지 이제 겨우 두 달 밖에 안 되는데 이렇게 도와주시다니 나는 눈물까지 나왔다.
스물 넷이 되도록 서울에 살아오면서도 세상 물정을 이렇게도 몰랐던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지만 한쪽에선 사기 사건이 일어나도 한쪽에선 인정이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기도 했다.
이제는 돈도 다 갚아 드렸지만 한 달이 되도록 한번도 독촉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미안해 할까와 피하시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이 카운터를 맡고 나서 꼭 잊지 못할 얼굴이 생긴 것이다. 지난날의 그 어여쁜 두 아가씨는 서울이란 곳에 더는 흙탕 칠을 하지 말고 좀 더 정직하게 살아주었으면 하고 부탁하고 싶을 따름이다.
양종수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63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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