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제 5화><「동양극장」시절>(4)박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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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양극장 탄생>
1935년 11월말에 서울 서대문 밖 마루턱 너머 감영 앞에「동양극장」이 섰다. 애초부터 연극전문극장으로 설계하여 회전무대(회전무대는 조선극장에도 있었다)와 창공벽(호리전트) , 짧고 좁고 작았으나마 소위「하나미찌」(화도)라는 무대의 통로도 있었다.
당시에 전 조선에서 연극을 할 수 있는 극장은 서울에「조선극장」「단성사」「우미관」 ,대구의「대구극장」 부산의「부산극장」 초량에「중앙극장」 함흥에「동명극장」, 그 후에선「명보 극장」 ,평양에「대성좌」, 진남포에「광주극장」 목포에「목포극장」 군산에「군산극장」등이 있었으나 함흥의 「동명」「명보」, 진남포의 「항좌」광주·목포·서울의「단성사」외에는 전 조선의 대소극장이 다 일인의 것이었고 그나마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은 없었는데 「동양극장」만은 영사실을 만들기는 했으나 애초에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극장으로 세운 것이다
의주출생의 홍순언이란 사람은 어려서부터 열거식당의「보이」노릇을 하다가 나중에는 평양의 철도국직영「야나기·호텔」지배인으로까지 기어올라갔는데 그때 마침 배구자라는 미모의 여자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 내력은 이렇다.
배구자는 배정자(『요화배정자』라는 영화도 나왔지만 그 주인공)의 오라비의 딸이다. 어려서 일녀마술사「천승」에게 몸을 맡기어 많은 제주를 태웠다. 그래서「천승」이가 그 대를 이어주려고「삼세 천승」의 전명을 주려는 무렵 배구자는 무용가가 되겠다는 희망이었지 마술사는 되고 싶지 않다고 야간도주하여 한없이 한없이 대륙으로 떠났다.
그러나 똑딱거리는 새 가슴은 뛰기만 했고 날개는 어려서 겨우 평양「야니기·호텔」에서 로비가 떨어지고 기진맥진 주저앉게 되니 SOS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호텔」의 지배인이 조선인. 홍순언이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자라기를 경어만 썼고 80%가 일어여서 남과 언쟁을 할 때도 일본말경어를 쓰는데 게다가 본시 성정이 온순하니 미모의 젊은 여자에게 여북 친절 다정하였으랴. 그래서 그렇고 그렇게 절차가지나「부부」라는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아낙이 된 배구자의 소원대로 서울에 와서 「배구자 무용연구소」라는 간판을 붙이고 발표회라는 이름으로 중앙극장(지금 그 자리 그 집)에서 「데뷔」했다.
그러나 세상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지라 이러쿵저러쿵 정음잡음이 많아서 배구자의 동생 용자·숙자, 그리고 호아를 갖다 길러준 홍가 성을 붙여 준 법준자(아편을 하고 윤락녀가 되었다더니 지금은 하처재인지)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배구자 소녀가극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길본흥업이리는 일본의 큰 흥행회사의 전속이 되어「다까라쓰가」「쇼주꾸」 다음가는 소녀악극단으로 인기를 날렸다.
그러니 배구자의 남편이자「파트롱」이던 홍순언이는 그「매니저」가 되어 그 소녀악극단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게 되었고 일본전국에 수백 개나 되고「길본체이」인「화월 극장」을 돌면서 흥행에 「문」을 들였고 극장운영의 묘를 배웠다
그래서 의주에 있는 오두막집을 팔고 평양에 있는 전방을 정리해서 1금4천원을 몽땅 꾸러 차고와 서울에서 낭인을 자처하는「와께지마」라는 일인 흥행사에게 무릎을 끓고 후원을 청했다. 그 덕에 상업은행에서 19만5천원의 대출을 받아 새 문밖 고개턱의 비탈을 깎고 공사를 시작했다. 그 동안의 홍순언의 고생은 많았다. 잠은 공사장 사무실 의자에서 자고 조석은 평동 마루턱에 있는「순대국」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에「순대국」으로 매웠다.
얼마 전에 작고한 독견 최상덕은『승방 비곡』하나 쓰고 평생 소세가로 끝마쳤지만 홍순언과는 처가 쪽으로 건건찝찝해서 장차. 극장 지배인이 된다는 전제아래 공사 중에도 상의를 했다.
그때 그 건물이 지금의 동양극장, 그냥 그대로의 집이니 혹 들어가 본 이는 알겠지만 아래위층에 요새말로 「화장실」이라는 변소가 있는데 큰 일을 치르는 칸이 단 두 칸뿐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홍순언이는 한 칸만으로 계획한 것을 최상덕이가 대변칸이 하나뿐이어서야 되느냐하니 홍순언 왈 『극장이란 연극 구경하러 오는 데지 똥누러오는데요』하고 한치라도 객석을 늘리겠다는 홍의 주장을 꺾고 한 칸 더 늘린 것이다.
금년은 돼지해다. 그때 그 동양극장을 지을 무렵 홍군이「돼지꿈」을 꾸었대서 그후 철철이「돼지고사」라는 걸 지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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