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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뒷골목의 구악…노예 암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발보아」항구에 이른 것은 자정이 약간 넘어서였기 때문에 아침에야 여객선에서 내리게되었다. 「파나마」의 땅은 두번째로 밟는다. 갑판 위에서 10여년 전 제l차 세계여행 때 북미에서 중미를 거쳐 남미로 육지를 따라 내려갈 때 들렀던 여러 곳을 굽어보노라니 감개무량했다. 여행「코스」로 보아 1차 때와 3차 때의「코스」가 십자로를 이루는데 이것은 나의 「고행으로서의 여행의 십자가」를 숙명적으로 상징하는 것 같아 더욱 감명 깊었다.
부둣가에서 3㎞쯤 떨어진 시내에 들어서니 「스페인」의 옛 도읍 같기도 하고 「프랑스」풍이 감도는 듯한 관광「호텔」을 비롯한 현대건축들이 통제 없이 늘어서 있으며 거리엔 상품에 대한 면세를 한다는 것을 선전하고있다. 마침 「필름」이 떨어졌기에 사려고 값을 물어보니 가게마다 가격이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엄청나게 비싸게 달라는 곳도 있다. 정찰제가 없어 손님의 호주머니를 봐가면서 물건을 파는 이 나라의 상도덕은 문란하다고 대뜸 느낄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호주나 「뉴질랜드」사회를 보아오다가 이렇듯 무질서한 상거래를 보기 때문인지 첫인상이 이 나라 사회는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것이라고 느꼈다.
이 나라 돈의 단위는 「발보아」인데, 이것은 태평양의 최초의 발견자인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동전엔 앞뒤가 뽀족하게 나온 철모를 그의 「릴리프」(반조각)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렇듯 미술적인 「디자인」으로된 돈을 쓰는 나라가 상도덕이란 서있지 않고 마구 바가지를 씌우는 것을 보니 문득 우리나라의 무질서한 상거래가 생각되었다.
해변도로를 걷고 있노라니까 1513년 태평양을 맨 먼저 발견한 「발보아」의 동상이 서있는데 그 아래 대석은 백인과「인디오」(「인디언」의 「스페인」말)가 지구를 감싸고있는 모양으로 되어있다. 「스페인」계통의 동상은 으례 이같이 지구를 많이 곁들인 것이 특징인데 이것은 옛날의 해양민족다운 그들의 생리를 나타낸 것으로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큰 뜻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파나마」에서는 무엇보다도 큰 관심거리가 노예매매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그전에 들었었기에 살펴보려고 길가에서 사귄 어떤 신사에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나라에선 지금도 노예를 팔고 산다는데 그게 정말이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그는 정색을 하며 『아니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어디서 들었소! 노예매매금지법이 생기고 노예해방이 된지가 언젠데 그런 잠꼬대 같은 말을 하시오』하며 극구 부인한다. 분명 노예매매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 신사는 혹 자기나라의 체면을 보아서 그러는가 싶었으나 이렇게 완강히 부인하니 더 캐볼 수 없었다.
이 신사와 헤진 뒤 값싼 음식을 사먹으려고 시장에 갔다가 물건을 파는 어떤 늙은이에게 값싼 빵을 하나 사면서 이 노예매매에 대하여 물었더니 『노예를 팔고 사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워낙 비밀이라 그 장소는 알 수 없다오. 그런데 젊은 외국양반, 그건 왜 물으시오. 노예를 사가려고 그러시오?』하고 묻기에 『아니올씨다. 여행가로서 알아보려고 그럴 뿐입니다』하고는 이곳을 떠났다.
웬만큼 살펴보면 소위 노예암시장에 가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공개된 곳이 아니므로 누구의 소개를 얻는다면 구경만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항해시간이 촉박하여 나중에 딴 곳에서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장담은 하지 못하지만 이 나라의 본토박이 늙은이도 긍정하는 것을 보니 노예매매가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시간이 없어 부랴부랴 배를 타기 위해 달리면서 노예해방을 시킨 「링컨」을 생각해 보았다.
그때처럼 노예를 쇠사슬로 묶는 가혹한 짓은 못하겠지만 여전히 이런 비참한 일이 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인간이란 그지없이 교활한 동물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이 나라 민족은 「스페인」계와 원주민인 「인디오」와의 혼혈종이 76%, 흑인이 13%, 원주민이 10%, 또 그 밖의 사람들이 사는데 거의 「가톨릭」교를 믿고 있다. 이 종교는 이곳을 차지한 「스페인」사람들이 정복의 한 방법으로서 퍼뜨린 것이지만 이 나라의 국민정신의 모체를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통치의 잘못인지 문맹자가 많으며, 얼른 보기에도 빈부의 차이가 굉장히 심해 보인다. <계속> 【「파나마」서 제3신 김찬삼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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