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 퍼포먼스’ 그만들 하시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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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호 30면

예전에는 글 한 편 발표하는 것은 물론이요 책 한 권 출간되는 게 요즘처럼 쉽지가 않았다. 권위 있는 출판사에서 자기 이름이 저자로 박힌 책이 나온다는 것은 입신출세를 뜻하기까지 했으니까. 어린 친구들로부터 과장된 것 아니냐, 거짓말 아니냐는 소릴 듣기 십상이겠지만 분명 사실이 그랬고, 세상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이토록 뿌리째 뽑혀나갈 듯 급격하게 변해가고 있다.

시간을 제 영혼 안으로 끌어당겨 천천히 흐르게 하기 전에는 감히 어느 누구도 ‘나는 세상 따라 미치지 않았노라’ 장담하기 힘든 시대다. 시간이 순간순간 대홍수처럼 강림해 인간과 인간에 대한 것들마저 휩쓸어 가버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막 등단할 무렵 내 주변의 문인들 중에는 제 책 한 권 구경해보지 못한 채 요절하는 선배들이 꽤 있었는데, 가령 깊은 밤 만취해 아파트 계단에서 굴러 목이 부러져 죽는 등 뭐, 대강 그런 식이었다.

황색 신문의 가십난에도 오르지 못한 그런 보잘것없는 비극을 두고 보통 사람들은 위악으로 가득 찬 술주정뱅이 한량의 말로라고들 혀를 찼지만, 그와 함께 문학을 하고 있던 우리는 그가 다름 아닌 문학 때문에 괴로워하다 어쩌면 가장 진지하게 죽어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동지애라기보다 차라리 전우애에 가까웠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무용지물 취급하며 모욕한들 당장 멋진 시 한 편만 쓴다면 살아서 할 일은 다 하는 거라는 열정과 오만이 우리의 남루를 하찮게 만들었으니, 우리의 버킷 리스트에는 문학을 잘하게 되는 것, 그것 한 줄 말고는 아무것도 적혀 있질 않았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평범한 한 사람이 이상한 글쟁이가 되어 그 이후의 삶 동안 차마 글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은 눈물겨운 일이다. 매번 똑같아 보이는 문장을 그래도 수천 번씩 되풀이해 고치고 온갖 수단으로 고뇌해도 풀리지 않는 인간이라는 수수께끼에 목숨을 거는 일은 애틋하나 위대하다. 사실 어느 분야에서든 바로 그러한 아둔함 속에서 장인은 태어난다. 장인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다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루고 싶은 단 하나의 일을 위해 그 나머지 모든 것들을 단호히 거절한다.

때로 장인들이 괴팍하다는 평을 들으나 막상 그들이 만들어놓은 것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응어리진 마음이 눈 녹듯 풀리는 까닭은 그래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 것은 그야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내 소관이 아니다. 다만 눈 멀고 귀 먹은 장인의 길이 천대받는 세상, 금방 이해할 수 없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곧바로 전부 쓰레기 취급을 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당당한 태도와 천진하기까지 한 눈망울이 끔찍한 것은 왜일까.

이 시대에 글쓰기로 예술을 하려는 것이 얼마나 비천한 짓인지는 잘 안다. 그러나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어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한 사람을 호명할 수는 있다. 한 마리 새가 죽으면 그 새 한 마리에게는 전 우주가 사라지듯이 한 마리 새를 노래하게 만들었다면 전 우주를 노래하게 만든 것 아니겠는가.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런데 막상 문학에 싸늘해진 세상보다 더 섭섭하고 화가 나는 것은 문학인들이 문학을 두고 망측한 짓들을 서슴지 않을 때다. 가령 어느 유명 작가의 명백한 표절과 그것을 모른 척 적극 옹호하는 평론가 교수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유가 해괴하고 결과가 흐지부지해질 게 틀림없는 ‘절필 퍼포먼스’를 일삼는 몇몇 문인들을 보면 나는 귀한 목숨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자살 쇼를 벌이는 양아치를 보는 것 같아 환멸이 치민다.

물론 절필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그것을 일간지에서 공개 선언할 적에는 절필에 대한 자신의 자격과 그러한 행동이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이들의 자긍심에 어떤 훼손을 가할지 정도는 좀 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당연히 제 말의 무게를 감당할 만한 책임 또한 차후 엄수돼야 할 것이다.

한 의사가 의사로서 대놓고 부끄러운 짓을 하면 다른 모든 의사가 우울한 것이 이치다. 늙수그레한 나이에 자살하기 직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어린이를 찾아가보는 것이 회심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면, 적어도 자살이 아닌 자살의 시늉으로 정치놀음과 나르시시즘의 허기를 달래거나 책 장사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인이 안하무인으로 살 수는 있다. 그러나 문인이 문학에 있어서 만큼은 안하무인일 수 없다. 그것이 자신의 책 한 권 구경해보지 못하고 죽은 동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이응준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 『국가의 사생활』과 시집 『애인』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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