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복지국가 매직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2호 31면

‘세금 해방일(Tax Freedom Day)’이란 게 있다. 근로자가 세금 부담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자신의 소득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 날을 일컫는 말이다.

On Sunday

지난달 말 프랑스의 몰리나리 경제연구소는 유럽연합(EU) 27개국(7월 1일에 가입한 크로아티아 제외)의 ‘세금 해방일’을 발표했다. 이 중 가장 늦게 세금에서 해방되는 나라는 벨기에였다. 해방일은 8월 8일. 벨기에 근로자들은 그 전날까지 번 돈을 고스란히 세금으로 바친다는 뜻이다. 덴마크(6월 6일), 스웨덴(6월 22일)보다 늦다.

벨기에는 유럽에서 ‘세금 챔피언’이라 불린다. 몰리나리 연구소에 따르면 벨기에인들은 소득 중 60.25%를 조세로 납부한다. 여기엔 직접 소득세와 연금·건강보험·실업보험과 같은 각종 사회보장부담금이 포함된다.

벨기에에 1년간 머물면서 만난 이들이 하나같이 관심사로 꺼낸 것도 세금이었다. 특히 현지 한국인들은 혀를 내둘렀는데, 소득세율이 최저 6%, 최고 38%인 한국에 비하면 최저 25%, 최고 50%를 걷는 벨기에의 세금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벨기에인들은 세금을 원천 징수하는 월급쟁이가 아닌 경우 대책을 따로 마련한다. 변호사 같은 개인사업자가 활용하는 ‘세금 통장’이 그 예다. 당장 손에 쥔 소득을 대책 없이 썼다가 세금을 낼 때 속수무책이 되지 않도록 적금을 든다. 사라져버릴 돈을 모으려고 적금을 든다는 게 우리에겐 낯설다. 하지만 벨기에 은행들은 관련 상품도 내놓는다. 원금은 사라져 버리지만 이자라도 남기기 위해서다.

이런 중세(重稅)에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엔 늘 같은 말이 뒤따른다. “그래도 아이 키우고 살면서 다 돌려받는다.” 세금이 좋을 건 없지만 벗어나야만 하는 대상도 아닌 것이다. 벨기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율이 30%를 넘는 복지 선진국이다.

많이 돌려받는 것만이 고율의 세금을 납득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당장 내가 혜택을 못 받아도 국가가 돈을 헛되이 쓰지 않으리라는 믿음, 내 아이의 보육을 국가가 함께 책임진다는 신뢰, 예상치 못하게 곤경에 빠졌을 때 정부가 안전망을 제공해 주리란 기대 같은 것들이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김상균 명예교수는 이를 ‘복지국가의 매직’이라고 했다. 국가가 국민의 돈을 걷어서 다시 나눠줬을 때, 복지 혜택과 함께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신뢰까지 국민에게 덤으로 돌아가는 마술이다. 국가의 마술이 신뢰를 낳고, 국민이 세금을 기꺼이 감당해 마술의 종잣돈을 만드는 선순환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증세없이 복지를 키울 수 없다고 말한다. 복지는 국민이 부담하는 만큼 돌아온다. 복지국가의 매직을 만들고 싶다면, ‘증세 없는 복지’에 매달릴 게 아니다. 국민에게 어떻게 믿음을 주고 납득시킬지를 고민해야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