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억 상품 12억 떨이해도 안팔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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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월드컵 공식상품 사업은 경험없는 사업권자의 무모한 사업 추진, 정부와 여론의 부추기기, 국제축구연맹(FIFA)의 까다로운 규제와 비싼 로열티, 국민의 무관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대실패로 끝났다.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수요 예측을 너무 낙관적이고 주먹구구로 해 공급과잉이 빚어졌다"며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은 "월드컵 공식상품 사업의 파행은 코오롱TNS가 2001년 12월 CPP코리아로부터 사업권을 넘겨받으면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당초 국내 사업권자는 홍콩과 영국 업체가 합작해 설립한 CPP코리아였다. CPP코리아는 이미 티셔츠.열쇠고리.배지 등 30여개 알짜배기 품목에 대해 선금을 받고 라이선스 계약을 끝낸 상태였다. 그러나 이 업체의 '공격적이지 못한' 사업 진행이 여론의 도마에 오르자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는 국내 업체로 교체해야 한다며 FIFA를 압박했다.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광고.마케팅 업체인 덴츠가 사업권을 갖고 활발한 월드컵 공식상품 마케팅을 펼치고 있었다. 한국조직위는 여행전문업체인 코오롱 TNS를 사업권자로 내정, FIFA에 사업권자 변경을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해 결국 코오롱TNS가 사업권을 딸 수 있게 도와줬다.

거액을 주고 뒤늦게 사업권을 인수한 코오롱TNS는 코오롱TNS월드라는 자회사를 만든 뒤 수지를 맞추기 위해 축구와 직접 관련이 없는 수백가지 품목에 대해서도 계약을 맺었다. 막걸리.김치 등 식음료까지도 월드컵 엠블럼이 찍혀 시중에 유통됐다.

축구공을 생산했던 비바스포츠 권오성 사장은 "코오롱TNS월드가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무리한 마케팅을 했고, 잡다한 상품을 많이 만들었다"고 말했다.

마스코트를 만들었던 이명재씨는 "FIFA의 제품 승인을 받는 단계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라이선스 대금을 내고도 제품의 서류 승인과 샘플 승인에 거의 2년을 소비했다. 월드컵 직전, 심지어 개막 후에 상품이 출시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붉은 악마'가 주도한 응원 열풍이 월드컵 공식상품 판매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SK텔레콤의 협찬을 받아 전개한 '붉은 옷 입기 운동'이 한국 대표팀의 승승장구와 맞물렸고, 붉은 악마가 디자인한 'Be the Reds' 티셔츠가 월드컵 공식상품인 것처럼 인식됐다.

상표를 도용한 붉은 티셔츠가 4천~5천원에 불티나게 팔리면서 2만원 이상 하는 공식 티셔츠는 변변히 눈길도 끌지 못했다. 영국 인터브랜드가 만든 월드컵 마스코트는 "국적 불명의 역대 최악인 마스코트"라는 혹평 속에 공식상품 전체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악영향을 끼쳤다.

결국 과잉 생산된 제품들은 고스란히 재고로 남았고, 코오롱TNS는 지난해 7월 고의 부도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파산선고를 얻어냈다.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현금 결제를 낙관했던 납품업체들은 휴지조각이 돼버린 어음을 손에 쥐고 한숨만 쉬고 있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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