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16)적 치하의 3개월(29)|요인납북(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전회에 이어「자비엣·마들렌」(75),「마리·앙리에트」(73)외 두 불란서인 수녀로부터 납북된 외국인 성직자와 미군 포로의「죽음의 행진」과 수용소 생활을 계속 들어보기로 하겠다. 여기에는 영하 30도의 강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자가 속출하는 참경이 눈에 보듯 전개된다. 그러나 믿음의 힘으로 모두가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 품에 안긴다.
『죽음의 행진을 강행하는 괴뢰 경비병은 임종 상태에서 비틀거리는 사람을 사정없이 쏘아 죽였습니다. 18명의 미군 포로와「베아트릭스」원장 수녀가 죽은 다음 행진은 밤늦게 야 끝났어요.「호랑이」수용 소장은 모든 포로들을 발뒤꿈치를 세워 꿇어앉히고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게 한 다음 줄기차게 강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자본주의 국가의 악행을 욕하는 것이었어요. 사람이 죽어 가는 마당인데도 이날 우리「갈멜」수녀들과「바오로」회 수녀들은「거룩하신 천주의 모친이여, 고민하는 우리를 도우소서. 불행한 당신 자녀들을 도우소서 마지막 신문이 닥쳐 온 우리를 딱하여 빌으 소서….」이렇게 기구했지요. 계속 4일 밤을 산과 옥수수 밭에서만 잤었으니 까요.
11윌3일「베아트릭스」원장 수녀에 이어 백 계 노서아 부인(57)이 어디론지 없어졌어요.

<두만강서 살에는 바람>
발목이 퉁 통 부은 채 행렬 뒤에 떨어 졌었는데 보이질 않거든요. 물을 것도 없이 괴뢰 병들에게 즉결 처분 당한 거지요.
11월4일 새벽에 눈이 내렸어요. 모두들 행여나 오늘 하루는 행진을 쉬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지만「호랑이」는 포로들의 이런 가련한 마음을 모르는 채 다시 강행군의 출발 신호를 냈어요. 내리는 눈은 발목을 덮고도 계속 내렸어요. 산길은 더욱 미끄러워졌고 두만강 건너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정없이 살을 애였어요. 숨은 차고 가빠졌습니다. 타는 듯이 목이 말라 가시덤불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서 목을 추겼지요. 이때 누구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죽음이란 아주 친한 친구의 방문처럼 기다려지는 것이었으니까요. 어떤 감시병은「당신들이 전쟁이 끝나 본국에 돌아가거든 미군 포로들의 총살 사건은 말하지 말아 주시요」라고 당부하기도 했어요.
11윌5일 새벽 1시까지 걸어서 중강진 읍내에 도착했어요. 막상 여기까지 우리를 몰고 온 감시병들은 더는 어디로 끌고 갈는지 모르는 모양이에요. 두 시간쯤 중강진 읍내를 이리저리 끌려 다니더니 어떤 큰 학교에 수용하데요.
날이 새자 성공회 수녀원장「마리·글라라」수녀님이 심장마비로 돌아 가셨습니다. 11월8일부터는 매일 반시간씩 학교 운동장에 나오게 해서 체조를 시켰어요. 81세의 우 신부님은 임종 직전이어서 이모임에 나오지 못했죠. 그러나「호랑이」에게는 이유가 필요치 않았어요. 우 신부님을 데리고 나오라고 호령호령하므로 다른 신부들이 하는 수 없이 우 신부님을 가마니 위에 뉘어서 운동장 구석으로 모시고 나왔습니다.
이날도 섭씨 영하 30도였어요. 우 신부님은 이런 고역을 3일 동안 견디고 11일 도 가마니에 들려서 운동장 한구석에 나와 있다가 천주 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는「오, 천주여,
죽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통을 당하여야 합니까?」하고 크게 부르짖으셨습니다. 정년 동안의 수도생활을 마치신 거죠.

<형제 신부 하루걸러 절명>
11월12일「갈멜」수녀원 지도 신부이신 공 신부님의 차례가 왔습니다. 공 신부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조찰 한 푸른 눈으로 수위를 한번 둘러 보셨습니다. 동생 신부님은 슬픔을 겉잡지 못하시고 눈물을 흘리며「형님, 천주께로 가시게 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천주께서는 형님을 받으려고 좋은 자리를 준비하고 계실 것입니다. 형님은 항상 천주 님을 잘 섬기셨으니 까요」라고 목메어 했어요.
공 신부님은 아무 고민도 없이 마지막 숨을 고요히 거두셨습니다. 동생 공 신부님도 행진하는 동안 이질로 고생 하셨는데 이튿날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공 신부님 형제는 76, 75세의 두 살 터울로 같은 날 신부 서품을 받고 50주 기념일을 지낸 지 며칠만에 6·25를 만났고, 하루 사이를 두고 천주께로 나란히 돌아가신 거죠.
난로를 피우고 대강 삶은 옥수수 알을 조금 주었습니다.「멕탈드」수녀님은 치아가 쑤시고 이 뿌리에서 피가 나오므로 더 들지를 못했습니다. 폐렴은 더 도져서 가슴이 찢어지는 기침을 밤낮으로 하였고요. 모두들 지쳤고 약도 없어 사랑하는 이의 괴로움을 보고도 도와주지 못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이 없어서「프랑스」공사는 수레에 나무통을 싣고서 3km 떨어진 두만강까지 가서 물을 길어 왔고요.

<정착 않고 민가로 운운도>
그러자 미군 포로까지 포함한 7백여 명이 우 우하고 양재기를 들고서 나서는 바람에 반 양재기 씩 밖에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미국 아가씨는 양재기에 얻은 냉수는 마시고 배급받은 멀건 배추 국으로 세수를 했어요. 국은 맹물 같았으니까요.
11월16일 다시 이동 명령이 났어요. 병자들은 남아서 무엇이건 탈것을 기다리기로 하고 아직 건강(?)한 사람만 먼저 걸어서 출발했어요. 조금 가다가는 하룻밤을 새고 밤 2시쯤 다시 출발했어요.「갈멜」수녀원장「데레사」수녀님은 이때 몹시 피로해서「벨라데바」수녀의 말에 안기다 시피 해서 30리의 밤길을 걸었어요. 어느 곳인지 모를 곳에서 행렬은 멎고 하룻밤 수용소가 될 민가의 사람들을 내쫓았어요.
물론 감시병들이 하는 짓이죠. 보통 민가의 방 하나에 20명 가량이 들어가려니까 비좁기 짝이 없고, 우리들은 모두 앉을 자리도 얻기 어려웠지요. 우리들 뒤에 처져 있던 「멕탈드」수녀님과 수련 장님 이야길 하겠어요.
이분들도 걸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걸을 수가 없었어요. 미군 포로에 부속되어 걷는 것이 몹시 불쌍했던지 좀 인정 있는 감시병은 좁쌀 실은 달구지에「멕탈드」수녀님과 수련 장님을 태워 주었어요. 몸은 얼어들고 절벽 같은 산골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고 흔들려 두 수녀님을 달구지에 잡아매었어요. 이튿날까지 달구지의 흔들림에 따라「멕탈드」수녀님은 신음하다가 그대로 천당의 영원한 평화 속으로 가셨지요.
11월19일「테레사」원장 수녀께서는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매우 피곤을 느끼며 열이 났어요. 의학 공부를 하신 신부님 한 분이 진찰하여 보고「아스피린」한 알 있으면 좋겠다고 했으나 그런 약을 구할 수가 있어야지요. 우리들은 입은 옷을 벗어서 덮고 깔아 드리고 했어도「테레사」원장 수녀님의 몸은 이내 굳어져 갔습니다.

<선전 위해 꾸민 인민 병원>
「원장 수녀님! 우리말이 들리시면 우리 손을 잡으십시오」하고 애타게 울부짖었지만 대답이 없었어요.
캄캄한 밤에 우리는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시병 4명이 시체를 묻고 다른 사람들은 삽을 들고 장사지내러 갔습니다. 그러나 땅이 너무 얼어서 깊이 팔 수가 없었어요.
11월25일에 교황사절 방 주교께서 또 운명하셨어요. 방 주교가 중태에 빠지자 감시병들은 인민 병원으로 옮기라고 명령했어요. 인민 병원이란 곳은 우리들이 시체실이라고 부르는 외딴 오두막집이에요. 침대도 간호원도 없는 차디찬 냉방입니다. 그래도 감시병들은 죽는 사람은 인민 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죽었다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것이죠. 방 주교 님은 사흘 밤낮을 담요 한 장 쓰고 냉방 바닥에서 신음하다가 선종 하셨어요. 방 주교는 중강진의 남쪽 하창리 마을 어귀에 묻혔지요. 영국인「이베」씨와「스위스」인 1명도 이 무렵 죽어 갔고요.「캐나다」신부님은 12월6일 내일은 일어나서 일을 하겠다고 쾌차해진 것처럼 말씀하시고는 몇 시간 후에 의식을 잃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어요.「카달」(강)신부님도 12월16일 그늘 없고 끝없는 행복을 누리러 떠나셨습니다.
대전교구의「빌토」신부님도 당뇨병과 기온이 지쳐 좁쌀 양재기를 밀어내며「못 먹겠어. 나도 다른 사람처럼 가겠어」하시더니 그 이튿날인 51년 1윌6일 임종 하셨어요.
세월은 흘러도 자유는 오지 않았습니다.「빌토」신부님까지「숙음의 행진」으로 희생된 신부 수녀만 16명이 됩니다. 약 1년 후 그 후유증으로 또 세 분이 희생되어 모두 19명이 되지요.
포로들은 매일 아침 영하 30∼40도의 혹한에서 의무적으로 체조를 시켰어요. 그래도 우리들 성직자들은 짧은 시간에 끝났지만 미군 포로는「원·투·드리」하면서 한시간 이상했지요.
여름옷에 먹는 것 없이 이 꼴이니 폐렴의 원인이 됐지요. 매일 아침 4, 5명씩 미군 포로들은 죽어 나갔어요. 토이기 부인은 미군들을 보고「저 다리는 우리 6살 난 꼬마의 다리보다 가늘구나. 사람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다니」하고 울었어요.

<미군 포로 7·8할이 사망>
미군들은 멀건 수수 죽을 모자에 받아먹고 의약의 혜택을 못 받아, 6·7할 이상이 죽어갔습니다.
이런 포로 생활이 중강진에서 다시 만포로, 후 창으로 전전하면서 53년 4월17일까지 만 2년9개월간 계속 됐어요. 그래도 52년 8월부터 수용소 관리를 중공군이 맡고서는 약간 형편이 나아졌어요. 휴전 상담이 무르익자 괴뢰는 우리를 평양으로 불렀어요.「코트」를 맞추어 주고「그 동안 인도적이며 후한 대접을 받아서 김일성 수상께 감사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시킵디다.「모스크바」를 경유, 각자의 조국으로 갔습니다. 54년 l월29일「우리의 전 교지의 우리 교우들은 얼마나 좋고 사랑스러운지」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바다의 파도 때문이 아니라 복받치는 감격의 열 때문이죠.
부산! 우리는 얼마나 기막힌 감격으로 한국 땅을 밟은 것입니까? 마중 나온 교우들의 감격의 눈물로 젖어 있는 그 눈! 눈! 눈!』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