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제자는 필자>인술개화(2)<제3화>|정구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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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현대식 병원>
내가 오오사까의 예과에 입학했을 때는 초창기이긴 하지만 우리 나라에도 서의 라고 부르는 현대 의학이 도입되어 세브란스 의학 교에서는 1908년에 1회 졸업생 7명을 내었고, 지금의 서울대학교 외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 전문학교 1902년에 1회 졸업생 9명을 배출한데 이어 1912년까지 7회의 졸업생을 내놓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 현대 의학이 들어 온 것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미국의 선교의사에 의한 것이고, 한 갈래는 일본의 군벌을 통한 것인데 이 땅에 먼저 현대식 내용의 병원을 세운 것은 일본 해군이었다.
l876년에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어 77년에 부산이 개항하자 부산에는 1천여 명이 넘는 일본사람이 옮겨왔다.
이것을 기화로 일본해군의 대군 이이던 야하라(지원)가 일본사람의 위생을 지킨다는 구실로 동래에 병원을 세우고 제생 병원이라고 이름지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에 병원이 선 처음인데, 야하라는 한국인도 치료해 주었으나 긴칼을 찬 군의가 무서워 잘 가지 않았다.
1880년에 원산이 개항하자 야하라는 옮겨가 생생 병원을 세웠고, 83년에 인천이 개항하자 공립병원을 세웠다.
해군에서 세운 이들 병원은 차차 일본의 침략이 진행되어 육군이 상륙하자 모두 병참시설로 바뀌고 새로이 서울 구리 개에 영사관 병원이란 것이 생기고 육군 대군의 유미세가 건너왔다. 부산에 있던 제생 병원은 우리 나라에 우두를 보급한 공이 있다. 1879년에 우두를 연구하던 지석영 선생이 여기에서 일본인의사 도쓰가에게 사사해서 우두 법을 배운 것이다.
지석영 선생은 1896년에 관립의학교가 생길 때는 교수를 지냈고 종두 원이 생길 때는 원장이 되었다. 내가 2살 때의 일이다.
1900년에 관립의 학교 부속병원이 생겼을 때는 원장이 되었는데 이 병원은 한-일 합방 후 조선 총독부 병원이 됐다가나 중(1928년)에 경성 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바뀌었다가 해방과 함께 지금의 서울대학병원이 됐다. 대한의원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외과대학이 전신이었다.
기독교 선교의사들을 통한 미국의 의학은 이보다 좀 늦게 들어왔다.
1884년 9월20일에 호레이스·뉴톤·아렌(한국 명 안연)이 지국을 거쳐 우리 나라에 온 것이 양의의 처음이다.
내가 나기 꼭 10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잘 알지는 못하나 알렌은 그때 32살의 의사로 내과·외과를 가리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일본 사람보다 한발 늦게 왔지만 이조 왕실과 사귀는데는 한 걸음 빨랐다.
바로 이해에 벌어진 갑신정변의 덕이었다. 알렌이 이 온지 두 달 만인 12월4일 밤에 개화당은 수구파의 중심인물이자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을 암살하려고 칼로 찔러 머리 등에 9개소의 상처를 입히는 난리가 났다.
민영익은 간신히 달아나 병상에 누워 의관들을 모조리 불렀으나 한약만 아는 한의들은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이 판국에 소개를 받아 민영익의 상처를 고친 사람이 알렌이었다.
알렌은 상처를 알 콜로 소독하고 역 청을 발라 곪지 않게 하고 몰 핀을 주사해 통증을 잊게 했는데 이것이 양의의 첫 진료였다.
이 치료의 덕으로 민영익은 넉 달만에 완쾌하여 크게 사례하고 궁중에서는 단번에 알렌을 믿게 되었다.
이 현대의술에 감탄한 궁중에서는 병원을 지었으면 좋겠다는 청을 받자 크게 찬동해서 1885년에 지금의 창 덕 여고 기숙사 자리에 있던 이완용의 친형인 이윤용의 집을 내주었다. 알렌은 여기에 선교 자금 3천 달러를 들여 왕립 병원 광혜원을 세웠던 것이다.
이 병원이 문을 열자 환자가 어찌나 밀렸던지 아렌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 미국 선교 부에 사람을 보내라고 졸라서 그해 7월에「존·H·히튼」이와 일을 보았다.
이 왕립병원이 곧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이다.
1886년에 병원 부속의학부를 개설했다가 1899년에「에비슨」이 제중원의 학교를 세워 이해에 첫 의학생을 모집했던 것이다.
내가 경성 고 보 2학년 때인 1908년에 세브란스의 제1회 졸업생이 나왔는데 7명이었다.
졸업식에는 초대 통감이던 이또오가 내빈으로 오기도 했는데 1회 졸업생 7명은 졸업과 동시에 면허를 받았던 것이다.
이 1회 졸업생은 1898년에 입학, 10년만에 졸업한 것인데 지금은 모두 작고했지만 김희영 김필순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 이었다.
나는 현대의학이 우리 나라에 도입된 경로를 생각할 때마다 섭섭한 느낌을 금치 못한다.
우리 손으로 세운 외과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손으로 의대하나쯤 세워야 한다는 내 소원은 30년만에 뜻밖에 독지가를 만나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를 세우게 될 줄은 그때로서는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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