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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初 불안감 줄이기' 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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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은 26일 새 정부 초기 사정(司正)의 속도를 조절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했다. "정권이 출범하면 사정과 조사활동이 소나기 오듯 해 국민들이 정권 초기 현상으로 느끼면서 불안감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였다.

취임 후 첫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최태원(崔泰源)SK회장 수감과 손길승(孫吉丞)그룹회장 소환설, 한화그룹에 대한 검찰 수사 재개로 재계가 긴장하는 시점의 발언이었다.

민주당 이윤수(李允洙)의원의 수뢰 혐의 수사가 보도된 직후였다.

이 때문에 盧당선자의 이날 발언엔 세 가지 배경이 깔린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선 경제에 대한 악영향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다.

이해성(李海成)홍보수석은 盧대통령의 언급이 최근의 재벌 수사도 염두에 둔 것이냐는 질문에 "그런 해석도 가능하겠죠"라고 했다. 문재인(文在寅)민정수석도 "재벌 수사가 잘못을 바로잡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에 주름살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이 대대적 재벌 수사에 나설 경우 재계의 투자 활동과 외국인 투자, 증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지적이 그간 나왔었다.

盧대통령의 언급이 이날 국회를 통과한 총리인준안 표결 직전에 나왔다는 점도 주목된다.

동교동계인 이윤수 의원은 대선 당시 반노(反盧)세력의 주축이었다. 이 때문에 민주당 내 구주류의 총리인준 반란표 가능성, 나아가 한나라당 의원들의 사정에 대한 경계심을 염두에 둔 '무마용 발언'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

더 크게는 盧대통령의 이날 발언이 그간 가다듬어온 '집권 1년차' 구상의 일단(一端)을 피력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盧대통령은 최근 참모들에게 "초반에 개혁의 전선을 너무 넓히는 것은 곤란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국정원 개혁이 뒤 순번으로 넘어간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집권 초의 소나기 사정은 일시적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부메랑처럼 짐으로 돌아온다는 점을 그가 잘 알고 있다는 전언이다.

김영삼(金泳三.YS)전 대통령은 93년에 재산공개, 하나회 숙청, 슬롯머신.동화은행 사건 등의 시리즈 개혁을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하지만 재산 공개.슬롯머신 수사 결과 박준규(朴浚圭)국회의장과 박철언(朴哲彦)의원의 낙마는 TK(대구.경북)지역의 거센 민심 이반을 불러 정권 내내 TK 민심 관리에 어려움을 안겼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 정부도 98년 세풍(稅風).북풍(北風).총풍(銃風)사건이 터지자 '국기 문란'이라며 한나라당과 이회창(李會昌)당시 총재를 압박했다.

하지만 대선 당시 DJ 비자금 자료 누출자로 지목됐던 배재욱(裵在昱)전 사정비서관의 구속기소와 권영해(權寧海)전 안기부장의 할복 사건이 겹치면서 '정치 보복'이라는 야당의 역공을 맞으며 이후 4년간 소수 정권의 괴로움을 맛보아야 했다.

이 때문에 '개혁과 국민통합'을 슬로건으로 내건 盧당선자가 '안정 속의 꾸준한 개혁'이라는 기조에 초반부터 차질을 빚지 않으려 개혁 속도와 폭의 조절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집권 직후부터 원내 과반수인 한나라당의 공세와 대기업군의 불만이 고조되고 가뜩이나 신통찮은 경제상황이 악화될 경우 예상치 못한 역풍(逆風)을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인 때문이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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