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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망각, 오늘에 이르느라 두고온 어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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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앤드루 와이어스, 크리스티나의 세계, 1948, 패널에 템페라, 81.9×121.3㎝, 뉴욕 현대미술관.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윤동주 ‘길’)

 쓸쓸함·상실감·갈망·향수…. 딱 이런 기분이다. 오늘에 이르느라 두고 온 어제, 그 길에 잃은 동생이라도 보는 것 같다. 그림 속 분홍 원피스 소녀는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영영 머물러 있을 것 같다.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린 그녀는 가고 싶은 길, 가야 할 길, 그러나 갈 수 없을지도 모를 길을 바라보고 있다. 슬프면서 반갑고, 적막하면서 따뜻한 그림이다.

 미국 화가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의 ‘크리스티나의 세계’(1948)다. 와이어스는 병약한 탓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일러스트레이터였던 부친에게 그림을 배웠다. 고향인 펜실베이니아주와 인근 메인주 일대에서 평생 지내며 친구와 이웃을 모델로 삼아 그곳 풍경을 그렸다.

 몸을 비튼 자세로 언덕 위의 적막한 건물을 바라보는 크리스티나 올슨 또한 와이어스의 이웃이었다. 와이어스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그녀가 들판을 기어가는 모습을 화실 창밖으로 보고 그림을 그리게 됐다. 저 언덕 위 집이 와이어스의 화실, 그 옆 작은 집이 크리스티나의 집이다. 혼자 걷지 못하는 그녀가 어떻게 여기까지 나왔을까. 앙상한 팔로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돌아가야 할 언덕 위 자기 집을 보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서른한 살에 그린 이 그림으로 와이어스는 일약 스타가 됐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구입했다. 당시 미국 현대미술의 대표 주자는 잭슨 폴록. 그의 추상 표현주의와 정반대로 이 그림은 상당히 예스럽다. 르네상스 무렵으로 되돌아간 듯한 재료인 템페라로, 그것도 시골 풍경을 그렸다. 그럼에도 널리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1948년 내가 이 그림을 그린 이후, 지금 나는 적어도 한 주에 한 번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전 세계 애호가들로부터 편지를 받는다”고 와이어스는 회고했다.

 이 그림은 올해 나온 SF영화 ‘오블리비언(망각)’에도 등장한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톰 크루즈)이 폐허가 된 지구에서 ‘두 도시 이야기’나 ‘고대 로마의 노래’ 같은 고전을 찾아 읽고, 이 그림을 보며 가슴 먹먹해 하는 대목이 있다. 124분간 이어지는 영화 중 ‘크리스티나의 세계’가 나온 분량은 얼마 안 됐지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상실과 회귀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이 한 점의 그림만 한 게 없었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