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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혹의 우리 하노이 포로 수용소|미 공군대령의 체험 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미군특공대의 월맹 내 미군 포로 구출작전을 벌인 후 포로문제는 1일 파리 평화회담과 유엔 총회에서 큰 쟁점으로 등장했다. 브루스 미 대표는『미군 포로의 인도적 처우와 조기 석방』을 위해 포로 구출 작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월맹에 선언할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레어드 미 국방장관도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언명했다. 총회 제3위원회는 포로의 인도적 처우를 보장토록 촉구하는 제출에 나선 것은 월맹이 포로교환협상이나 인도적 처우를 규정한 제네바 협정의 준수를 완강히 거부해 왔기 때문. 67년9월 월맹 상공에서 폭격 중 격추되어 68년 보스턴 대학의 하워드·진 교수가 이끄는 평화단체의 교섭으로 석방된 노리스·오벌리 미 공군대령의 포로생활 중에 겪은 고난의 수기를 소개해 본다. 그의 수기는 아직도 남아 있는 미군 포로들을 위해 보류됐다가 이번에 처음 발표됐다.
월맹이 미군 포로들에게 가하는 잔 학 행위는 나치스나 북괴의 포로 수용에 비교가 안될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나는 한번 심문을 받던 중 다리를 꼬았다고 총개머리 판으로 두 번 머리를 얻어맞은 적이 있다. 월맹 인들은 다리를 꼬는 것이 상대방에게 무례한 짓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식의 고문은 보다 정교한 형태의 고통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길이 3m, 폭 2m30cm의 협소한 감방에 갇혀서 몇 년을 기약 없이 썩어 가는 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나의 월맹생활은 67년 9월11일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그날 군사분계선 북방 95km지점에서 남하하고 있는 트럭 대열에 대해 급강하 폭격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지상포화가 나의 비행기 기관에 맞아 조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낙하산으로 고장난 비행기에서 탈출한 나는 논바닥에 떨어진 직후 수동무전기로 구조 헬리콥터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상포화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헬리콥터는 오지 못하고 말았다.
그날저녁 나는 논바닥을 헤매면서 새웠다. 거머리들이 시커멓게 다리를 기어올라오자 나는 몸서리쳤다.
다음날 새벽녘 2백여 명의 민간인들에게 잡혀 나흘 후 월맹군에 넘겨지기까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고비를 넘겼다. 이 민간들은 나를 마을로 끌고 다니면서 때리고 침을 뱉고 심지어는 나의 몸에 오줌까지도 싸는 것이었다.
몽둥이와 돌을 든 부녀자와 아이들은 오히려 장년의 남자들보다 더 악독했다. 이들은 나에게 모욕감을 주기 위해 조그만 소녀들에게 자동소총을 들려 나를 감시하게 했다.
얼마 후 군인들이 와서 나를 철사로 드럼통에 묶은 후 트럭에 묻고 북쪽으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탈출 할 때 등에 상처를 입었지만 군인들은 그 상처가 경상이란 진단을 내리고 아무 약도 발라주지 않았다 이 사어가 곪아 버렸다. 그때부터 29일 동안 빈 시에 갇혀 있었는데 군인들은 나를 널 판에 엎드리게 하고 젖은 밧줄로 팔목과 다리를 묶었다. 상처는 그런 자세로 지나는 동안 저절로 아물었다.
그곳에서 하오니 까지 운반되는데는 7주가 걸렸다. 차는 밤에만 달렸고 낮에는 숲 속에 위장된 채 숨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노이·힐튼 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 프랑스군 감방에 수용되었다. 이곳에서는 독방도 있었지만 나는 다행히도 둘째 달부터 다른 한 명의 미군 포로와 함께 수용되었다. 이 동료의 이름은 그의 가족의 기분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밝히지 않겠다.
그러나 한가지 월맹이 제공한 3백35명의 미군포로 명단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만 지적하고 싶다.
이 명단에는 나와 같은 감방에 있던 그 동료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월맹은 40명 내지 50명의 미군 포로들이 크리스마스·파티에 참석하는 사진을 공개한 적이 있지만 나로서는 그런 선심이 베풀어진다고 믿기가 어렵다. 67년의 크리스마스 때 나는 거기 있었지만 파티 같은데 간 적은 없다.
식사와 휴식시간은 하루 두 번, 오락이라고는 하루 두 번씩 있는 영어선전방송을 듣는 일 뿐이다. 때때로 이들은 전사한 미군 몸에서 빼낸 편지를 읽어주기도 했다.
가끔 2, 3백 명의 민간인들이 나의 감방 앞에 몰려 왔는데 그때마다 나는 린치(치형)를 당하는 게 아닌가 하고 두려워했지만 대개 이들은 나에 대한 분노와 호기심이 엇갈린 감정으로 나를 구경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때로 이들은 나에게 친절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 동안 35파운드나 체중이 빠졌지만 68년 석방될 때의 나의 건강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월맹은 미군 포로들이 길거리에 끌려나가 얻어맞는 광경을 찍은 사진이 외부에 새어나가 자신들의 이미지가 손상되었다고 생각하고 우리를 석방함으로써 자기들이 인도적이라는 새 이미지를 심으려 한 것 같다. <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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