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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실적부진·건강악화에 무너진 'IT 샐러리맨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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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박병엽 부회장

“역량 부재한 경영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만을 드린 것 같다. 번거롭지 않게 조용히 떠나고자 한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 ‘샐러리맨 신화’를 일궈낸 박병엽(51) 팬택 부회장이 무대를 떠난다. 그는 실적 악화에 대한 책임을 지고 24일 은행 채권단에 대표이사직 사의를 표명했다. 1991년 10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마련한 4000만원으로 팬택을 창업한 뒤 삼성·LG에 이은 국내 3대 휴대전화 메이커로 키웠지만 결국 세계 시장의 거대한 흐름 앞에서 고개를 떨궜다.

 박 부회장은 2011년 말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졸업을 앞두고 채권단과 이견을 보이자 기자회견을 열고 “휴식을 갖고 싶다”며 ‘깜짝 사퇴’ 카드를 들고 나와 재신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사정이 달라 보인다. 팬택 관계자는 “2007년 워크아웃에 들어갈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못하고 업무를 계속하면서 생긴 건강상의 문제도 고려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심혈관에 스텐트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고 근막석회증(근육이 뭉치고 염증물질이 쌓이면서 통증이 이어지는 증상)이 생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던 박 부회장은 최근 들어서는 갑상선 항진증에 시달려온 것으로 전해졌다.

 ‘팬택 신화’의 주인공이 물러날 결심을 한 결정적 배경은 실적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 대한 압박감이다. 팬택은 올 초부터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임금을 10∼35% 줄이는 등의 자구 노력을 펼쳐왔으나 4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채권단에 제출한 ‘사업구조혁신방안’에 따르면 팬택 전체 직원의 3분의 1 수준인 800여 명이 다음 달부터 6개월간 무급휴직에 들어간다. 이처럼 인력조정 카드까지 꺼내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처하자 박 부회장의 기세도 꺾였다는 것이다. 한때 4500여 명이던 팬택의 인력은 이미 2500여 명으로 급격히 줄었다.

 팬택의 회생을 위해 ‘실탄’으로 불리는 투자금을 열심히 모았지만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것도 퇴진을 재촉했다. 그는 올 2월 퀄컴에서 2300만 달러(약 250억원), 5월 삼성에서 530억원을 유치했다. 여기에 산업은행과 우리은행·농협·대구은행으로부터 1565억원(상환분을 빼면 825억원)을 끌어들였다. 그의 말마따나 ‘목숨을 걸고’ 투자를 유치한 것이다. 이렇게 확보한 추가자금을 연구개발(R&D)과 마케팅에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지난달 출시한 롱텀에볼루션 어드밴스트(LTE-A) 스마트폰 ‘베가 LTE-A’의 제품 홍보에 온 힘을 기울였다. 지문인식 기능을 달아 보안 기능을 강화했고, LG전자의 ‘LG G2’처럼 뒷면에 버튼을 배치해 ‘뒤태’ 트렌드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삼성과 애플의 양대 산맥이 굳어진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시장에서만 연 35만 대 정도를 팔았지만 2010년 이후에는 삼성과 애플의 시장지배력에 밀리면서 20만 대 벽을 넘기 힘들어졌다. 지난해 4분기 344만 대이던 전 세계 판매량도 올 2분기에는 119만 대로 감소했다. 업계에서는 “노키아와 모토로라가 무너지는 판국에 팬택이 저만큼 버틴 건 엄청난 저력을 입증한 셈”이라고 평가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퀄컴과 삼성 이후에는 추가 투자도 끊겼다. 팬택은 소프트웨어 강화를 포함한 경쟁력 강화 대책을 내놨지만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게 업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박 부회장은 이날 사의를 표명하면서 “채권단과 주주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못해 송구스럽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 부회장은 4년8개월의 워크아웃 기간 동안 66차례 해외 출장을 다니며 팬택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애를 썼다. 지구를 스무 바퀴 돈 것과 맞먹는 거리였다. 워크아웃에 들어갈 당시 평가액이 4000억원대에 달했던 자신의 지분을 포기하고 백의종군할 정도로 회사에 ‘무한애정’을 보였던 박 부회장이다.

 “우리 회사는 해마다 끈기를 잃지 않고 집요하게 노력하는 사람에게 마사이상을 준다. 마사이족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

 집요한 승부근성으로 ‘마사이 족장’이라고 불리던 박 부회장은 결국 이어지는 마른 하늘을 견디지 못하고 기우제를 중단했다. 팬택의 기우제는 각자 대표였던 이준우 부사장이 이어 받을 전망이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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