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리즘 넘어 메르켈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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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독일 기민·기사당이 총선에서 단독 과반에 5석 모자라는 압승을 거뒀다. 22일(현지시간) 출구조사 발표 직후 메르켈 총리가 손을 들어 지지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오른쪽). 왼쪽은 독일 첫 여성 총리에 당선된 2005년, 가운데는 재선과 보수연정 구성에 성공한 2009년의 메르켈. [베를린 로이터=뉴스1]

독일어로 개선장군을 뜻하는 트리움파토르(Triumphator). 사전에는 없는 이 단어의 여성형 트리움파토린(Triumphatorin)이 생길 전망이다. 중도우파 기민·기사당을 이끌고 22일 총선에서 ‘역사적 대승’을 거둔 앙겔라 메르켈(59) 독일 총리를 수식하기 위해서다.

거창한 구호 대신 솔직한 화법

 단독 과반에 불과 5석 모자라는 압승을 올린 메르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재건과 부흥을 이룩한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에 비유되기까지 한다. 같은 기민당 출신인 아데나워는 1957년 50.2% 득표율로 전후 서독과 통일독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과반을 달성했다.

 독일 총선은 41.5%의 득표율을 올린 기민·기사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더 정확히는 3선에 성공한 메르켈 개인의 승리였다. 2005년 독일 첫 여성 총리가 돼 칸츨러(Kanzler·총리)의 여성형 명사인 칸츨러린(Kanzlerin)이란 단어를 탄생시킨 메르켈은 지금까지 8년을 집권했다. 향후 4년을 더하면 12년이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1925∼2013) 전 영국 총리(11년 재임)보다 집권 기간이 긴 유럽 최장수 여성 총리 자리가 예약된 상태다.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은 23일 대처리즘에 비유해 메르켈리즘의 시대가 만개했다고 보도했다.

3선에 성공한 메르켈 독일 총리가 22일(현지시간) 저녁 출구조사 발표 뒤 베를린의 기민당 당사에서 당원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마이크 앞으로 이동하고 있다. [AP=뉴시스]▷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민·기사당의 득표율은 선거 전 여론조사보다 2%포인트가량 많은 수치다. 메르켈 특유의 성품과 정치 스타일, 그리고 이를 잘 활용한 선거 전략이 만든 작품이다. 해외에서는 ‘게르만의 철의 여인’ ‘프라우 나인(Frau Nein·아니요 부인)’ 등의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무티(Mutti·엄마)’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부드럽고 안정감 있는 여성적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다.

 제1 야당인 중도좌파 사민당은 25.7%를 득표했다. 좌파당과 녹색당이 각각 8.6%와 8.4%의 표를 얻어 그 뒤를 이었다.

41.5% 득표하며 과반 육박 압승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기민·기사당과 보수연정을 함께했던 자민당의 몰락이다. 4.8%의 득표로 지역구와 비례대표 양쪽에서 의석을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자민당이 하원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1949년 이후 처음이다. 지나치게 친기업적 이미지를 드러낸 게 화근이었다.

 자민당의 지리멸렬로 메르켈의 승리는 다소 빛이 바랬다. 4년간 유지됐던 우파 연정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의회에서 법안 통과를 안정적으로 보장받으려면 다른 연정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 메르켈과 기민당 지도부는 23일 만나 연정 구성 전략을 논의했다.

 현재로선 사민당과의 좌우 대연정이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다. 사민당 총리 후보인 페어 슈타인브뤼크는 메르켈이 이끄는 연정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메르켈이 압승을 거둔 상황에서 책임 있는 양대 정당인 사민당이 연정 제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기는 어려운 입장이 됐다. 당 노동정책 책임자인 클라우스 비제휘겔 등은 대연정에 긍정적이다. 8년 전 메르켈이 처음 정권을 잡았을 때 두 당은 연대를 했다.

 메르켈은 대외적으로 두 가지 큰 숙제를 안고 있다. 유로존 금융위기 재발을 막는 장치들을 만드는 일과 그리스 정부의 부채 문제를 어떻게 해소하느냐다.

 연정 협상과정에선 주요 정책과 각료 배분 등을 놓고 치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길어지면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 사민당은 메르켈이 밀어붙여온 그리스에 대한 긴축 압박을 다소 완화하고 성장을 유도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독일이 2차 세계대전 후 마셜플랜을 통해 대규모 재건자금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 등 재정위기 국가에 대한 지원을 전향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국내 문제에 있어선 부자 증세와 동일 최저임금제가 협상 대상이다. 메르켈이 대연정을 구성하는 대가로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느냐가 관심거리다.

자민당 몰락 … 좌우연정 나서야

 기민당에서는 녹색당과의 연정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탈원전 등 친환경정책을 우선시하는 녹색당은 1998~2005년 사민당 주도 연정에 참여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회 선거에서 23%에 달하는 지지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부자증세와 함께 ‘시속 30㎞ 운전 지역 확대’ ‘주 1회 육식 안 하기’ 등 다소 엉뚱한 공약을 내건 녹색당은 인기 하락으로 68석 중 5석을 잃었다. 녹색당은 기민·기사당과의 연정에 부정적이다.

베를린=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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