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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효과' … 지방 가느니 차라리 딴 직장 간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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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특별자치시 어진동 정부세종청사 모습. 왼쪽이 국무총리실이고 오른쪽이 기획재정부?국토교통부 등 각 부처로 연결되는 통로다. 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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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시 이전을 앞둔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선 올해 들어 6월 말까지 4명의 이직자가 생겼다. 40대 박사급 연구원은 “자녀가 고3이 되기 때문에 세종시에 갈 수 없다”고 설명한 뒤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30대 연구원도 “곧 아이가 태어나는 데다 남편이 서울에서 일해 세종시로 옮길 수 없다”며 떠났다. 일단 세종시로 가기로 결정했다는 박사급 연구원 A씨는 “올해는 그나마 3명을 신규로 뽑았지만 (5명이 떠난) 지난해엔 1명밖에 안 들어와서 ‘세종시 이펙트’(효과)라고들 한다”며 “우리 연구원에 오려던 이들도 (세종시로 가지 않는) 한국금융연구원이나 자본시장연구원으로 가더라”고 전했다. 남은 동료 중에서도 조만간 사퇴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이가 많아 연구원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해 박사급 연구원 10명을 선발한 데 이어 올해도 9명을 뽑았다. 1년에 2~3명만 뽑던 과거와 다르다. 내년 세종시 이전을 앞두고 최근 3년간 30명(2011년 11명, 2012년 13명, 2013년 6명)이 빠져나간 구멍을 메우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충원된 인력 중엔 경험이 없는 30대가 많아 “연구의 질이 낮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떠난 이들 중엔 정책 연구를 10년 이상 해온 40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최근 대학으로 옮긴 B씨는 “허리 역할을 해야 하는 40대가 떠나고 30, 50대만 남는 기형적 구조가 되고 있다”며 “국책연구기관은 사회 이슈를 선도해야 하는데 요새는 이슈를 쫓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은 동료들도 ‘신규 채용을 하더라도 뛰어난 사람보다는 오래 남을 사람을 뽑는 게 목적’이라며 걱정하더라”고 전했다.

서울 잔류 기관 4곳은 이직자 적어
국책연구기관(정부출연연구기관)은 국가 정책의 근거가 되는 연구를 맡는 정부의 핵심 싱크탱크다. 이 중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4개 기관 1143명이 ‘공공기관 지방이전계획’에 따라 올해 말 세종시로 내려가고 KIEP 등 12개 기관 2241명이 내년 말까지 세종시로 이전할 예정이다.

그러나 최근 인력 유출이 가속화하고 있다. 중앙SUNDAY가 국회 정무위 소속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연구기관 이직률 현황’에 따르면 세종시 이전 기관 중 13곳(연구기관 25곳을 관할하는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미래창조과학부 소관인 기초기술연구회·산업기술연구회는 집계에서 빠짐)에서만 2011년부터 올해 6월 말까지 184명이 떠났다. 이전에도 기관별 이직자가 매해 2~3명씩 있었지만 세종시 이전 계획이 발표된 2005년 이후 그 수가 가파르게 늘고 있다는 게 기관들의 말이다. 세종시 수정안이 논의되면서 이전 계획이 백지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던 2009년 전후를 비교해도 이직자 수는 45명(2009년)에서 55명(2010년), 64명(2011년), 71명(2012년)으로 증가 일로다. 올 상반기에도 49명이 떠나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올해에만 98명이 떠날 거란 전망이다.

인력 엑소더스는 서울 잔류 기관 4곳(한국형사정책연구원·한국행정연구원·한국여성정책연구원·통일연구원)과 비교해도 분명하다. 이들은 최근 수년간 이직자 수가 매해 1~3명에 불과했다. 혁신도시특별법에 따라 다른 지방으로 이전하는 연구기관 6곳도 세종시 이전 기관과 유사한 인력 유출을 겪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울산), 한국해양수산개발원(부산), 정보통신정책연구원·한국교육개발원·한국교육과정평가원(충북 진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전남 나주) 등이다.

떠나는 이들 중 대다수는 국내 명문대를 졸업하고 해외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전문 인력이다. 과거 국책연구기관은 산업화를 주도하며 인재가 모이던 곳이었다. 5년 넘게 국책연구기관에서 일하다 교수직을 택한 C씨는 “대학이나 민간 연구원보다 대우가 좋지 않아도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티던 이들도 세종시 이전으로 희생할 게 더 많아지니 떠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서울보다 교육 여건이 열악하다는 지방으로 자녀들을 전학시키거나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걸 감수해야 해서다.

보건사회硏, 올해만 일곱 차례 채용공고
여성 연구 인력이 남성보다 많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최근 3년간 12명이 떠나 올해 채용 공고를 일곱 번이나 냈다. 이곳 총무인사팀 담당자는 “초임 박사급 연구원 연봉이 5000만원이 안 되는데 세종시로 간다고 관사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고 청약 우선권을 주는 것밖에 없어 가족과 헤어지기 어렵다는 여성이 많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국책연구기관인 KDI에서도 2011, 2012년에 각각 14명씩 떠난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만 10명이 빠져나갔다. KDI 연구사업팀 직원은 “나간 사람들이 하던 연구가 중단돼 이를 계속할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어렵다”고 전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기관이 내놓는 연구물의 질이 낮아졌다는 지적도 잇따라 나온다. 감사원은 4일 “KDI가 경제성이 낮아 검토 대상이 아닌 사업을 민자사업에 포함시켰다”고 지적하는 자료를 냈다. ‘세종시 연결도로 민자사업’의 비용 대비 편익(B/C) 비율이 낮은데도 사업을 반려하지 않고 2단계 검토를 추진했다는 내용 등이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기관당 3편의 보고서를 무작위 점검한 결과 75편 중 48편에서 표절 의심 사례가 229건이나 나오기도 했다.

기관 인력 중 세종시와 가까운 충청권 출신이 많아지는 데 대한 우려도 나온다. 박사급 연구원 A씨는 “최근 지방 대학 출신, 충청권 지원자가 늘어난다고 들었는데 그런 구성은 연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객관적이어야 할 연구에 지역 논리가 반영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이들 기관의 연구에 기반한 정부 정책도 신뢰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는 평이다. 하지만 우수 인력을 유치할 당근도 마땅치 않다. 평균 연봉이 낮고 정년이 60세로 대학(65세)에 비해 짧은 데다 사학연금이 있는 대학교수와 달리 노후 보장책도 없기 때문이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임정천 청사 이전 단장은 “정년 연장이나 연금제도 도입, 급여의 단계적 인상, 능률 성과급 확충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연구원은 재택·원격근무 확대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기관은 재정 부실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세종시 신청사를 짓는 데 드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기존 서울 청사를 매각해야 하는데 부동산 경기 침체로 그마저 여의치 않아서다.

이들 기관이 정부 부처와 인접해야 한다는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동안 기관들이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부에 유리한 데이터를 내놓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조원진 의원은 “부처와 연구기관들이 세종시에 함께 거주하다 보면 맞춤식 연구용역의 우려가 있어 연구의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이들 기관의 연구는 국가 정책 기반인 만큼 적절한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조 의원은 “연구원들의 이직률이 높아지면 연구 중단·지연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어 고급인력 유치 방안도 적극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세종대 변창흠(행정학) 교수도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연구기관들이 내려가는 게 결정됐고 실제 지역 발전 계기가 될 수 있는 만큼 정부가 획기적으로 지원해 연구원들이 소신과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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