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세르의 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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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역사책을 펼쳐보면 용기에 넘쳐 빛나는 역할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중대한 시기에 몸소 그 역할을 상연한 영웅들이 많이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 가운데에는 오직 그러한 역할을 상연하는 배우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실현될 수 없던 위대한 영웅적 역할들도 또한 많은 것이다.
내 신념이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아랍권 내에는 한 역할이 있으며, 그것은 자기를 상연해 줄만한 배우를 하염없이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나세르가 1953년에 쓴 『혁명의 철학』속에 적힌 한 구절이다. 그의 말처럼 이 『위대한 영웅적 역할』이 나세르라는 다시없는 배우를 만나, 중동의 역사에 새로운 한 챕터를 기록해 주었던 것이다.
1952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부터 1970년9월28일 새벽에 급서하기까지의 18년 동안, 라세르는 아랍 세계에 쉴새없이 새로운 신화를 마련해 나갔다. 1억 아랍인의 구심점은 바로 이 신화에 있었다.
그러나 신화는 언제나 현실과 먼거리에 있는 법이다.
『현실과 환상과는 얼마나 달랐는가. 나를 찾아온 군중은 오합지중이오, 낙오자들이었다. 전위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사실은 이제부터 그 사명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에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그의 꿈과 그 자신이 이룩한 업적사이에도 큰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혁명은 성공했으나 그 결과는 그 자신에게도 만족스러운 것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네가 성취한 혁명은 민중의 생활수준을 변혁시킨다는, 모든 혁명에 공통적인 목적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혁명이 한민족의 정신적 수준을 변혁시켜 놓지 않은 채로 그저 생활수준만을 변혁시켜 놓는다는 것은 그들을 위하여 더 한층의 불행을 준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언젠가 앙드레·말로가 이집트의 지식인들에게 한말이었으며 이 말을 누구보다도 더 뜨끔하게 들었던 것이 바로 나세르 자신이었을 것이다.
특히 그에게는 이스라엘과의 굴욕적인 6일 전쟁 이후의 나날은 좌절과 실의의 연속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메시아』(구세주)로서의 그의 연기는 전아랍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능숙한 것이었다.
이래서 적어도 아랍인들에게는 그가 처음으로 사명감과 꿈을 안겨준 불세출의 영웅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는 이제 죽었다. 그가 끝내지 못한 『영웅적 역할』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신화의 빛이 너무도 찬란했던 것이 도리어 화가 되어 아랍 세계에는 좀처럼 새 배우가 나타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역사의 비극이라고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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