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운동권'이 古語 되는 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운동권'의 역사에 비하면 '운동권'이란 단어가 국어사전에 오른 지는 얼마 안된다.

1991년에 금성출판사가 펴낸 국어대사전에 처음으로 운동권이 눈에 띄고,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민중서림 발간)이 운동권을 등장시킨 것은 94년 판에서다. '인권운동.평화운동.학생운동 등,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진력하는 사람들의 테두리'라고 되어 있다.

국립국어연구원이 99년에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변혁'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다. '노동운동.인권운동.학생운동 따위와 같은 사회 변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의 무리'가 운동권이다.

앞으로 또 세월이 지나면 운동권의 사전적 정의는 어떻게 변할까.

'70년대 반독재.민주화 운동부터 90년대 비정부기구(NGO) 활동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비주류로 사회개혁을 주창하던 세력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 사회의 주류로 부상한 이후 계층적 구분이 모호해진 사람의 무리'

'<고어(古語)>:사회 각 분야에서의 참여와 사이버 세상을 통한 연대(連帶)가 일반화되면서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된 말'

잠시 어쭙잖은 상상력을 동원해봤지만, 어느 쪽이든 운동권의 사전적 정의가 바뀌어 갈 것임은 틀림없다. 운동권은 격동의 우리 사회와 함께 과거부터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해갈 것이므로 점점 더 한마디로 파악하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운동권은 다른 나라 말로 옮기기도 불가능하다. 민주화 운동에서부터 주사파(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세력)에 이르기까지 이념 편차가 큰 세력들을 한데 묶어 부르는 단어는 영어에도 일본어에도 없다.

서구의 진보.보수 역사는 길다.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진 후 70년대에서야 운동권 1세대가 조직화되기 시작한다. 그후 약 30년간 우리 사회는 '압축성장'과 마찬가지의 '압축운동'을 경험했다.

반독재.민주화.노동운동.친북.주사파.반미.분신자살.방화.몰락.전향.시민운동.문화운동.비정부기구 활동 등이 모두 그 30년에 압축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세대 운동권이었으면서도 지금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경우가 많다. 주사파 중에서도 골수 주사파였던 김영환.하영옥.조유식씨의 경우가 가장 극적이다.

서울대 재학 시절 북한에 의해 각각 관악산 1.2.3호라는 암호명까지 받았던 이들의 오늘은 천양지판이다. 밀입북까지 했던 1호(김영환).3호(조유식)는 주체사상의 실체를 보고는 1백80도 전향했다. 현재 金씨는 반북활동을 하고 있고, 曺씨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 대표다.

그러나 밀입북하려다 자신이 타고 갈 북한 반잠수정이 우리 군에 의해 격침돼 북한에 가지 못했던 2호(하영옥)는 생각을 바꾸지 않아 현재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이렇게 서로 편차가 크면서도 짧게 압축된 하나의 흐름이 운동권이다. 그 운동권의 흐름이 인터넷과 결합하면서 탄생한 정권이 노무현 정권이고 보면, 역설적으로 盧정권 역시 박정희 정권의 '유산'이긴 마찬가지다.

이제 노무현 정권의 출범과 함께 운동권이란 단어의 정의도 바뀔 것이다.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주류로 진입하고 있고, 운동의 대상도 달라졌다. 운동의 방법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인터넷에서의 사이버 연대는 언제, 어디로, 어디까지 튈지 모르는 '신(新)사회운동'의 특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노무현 정권도 이를 사전에 제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 10년 뒤에 새로 나올 국어사전에는 운동권이 어떻게 정의될지, 그때는 이미 나라의 명운이 갈려 있을 때일 것이다.

김수길 기획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