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통신] 이라크戰 대비 全국민에 방독면 지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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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엊그제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전쟁 준비는 끝났다"고 말했다. 유엔 결의를 통하든, 통하지 않든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이스라엘의 한 국방부 관계자는 프랑스.러시아.독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임박했다고 전했다. 모세 야알론 참모총장은 "코끼리가 달리기 시작했다"면서 "누구도 이를 막아 세우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관심사는 걸프전 때와 마찬가지로 두가지다. 이라크가 다시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발사할 것인지가 하나고, 다른 하나는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이라크가 지난 걸프전 때와 마찬가지로 매일 오후 이스라엘에 미사일을 쏘아 댈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라크의 기습공격에 대비, 공군 방어력을 올려놓았다"며 대공방어 태세를 완비했음을 암시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전 국민에게 이미 방독면 지급을 완료한 상태다. 유학생들과 거주 외국인들에게도 공급을 시작했다. 지난주에는 초등학교 등 각급 학교에서 학부모를 초청, 생화학무기 공격에 대비한 실습 교육과 훈련을 마쳤다.

유명환 주 이스라엘 한국대사는 "5백여명의 한국교민 대피 계획을 세웠다"고 밝히고, "관계자가 직접 에일라트(이스라엘의 최남단 홍해 근처의 휴양도시)에 내려가 호텔 방들을 잡아 뒀다"고 전했다. 가는 곳마다 터무니없이 높은 값을 부르는 바람에 예약에 무척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지금 이스라엘 국민은 대체로 전쟁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내놓고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대표적 반전.반핵.평화단체인 '샬롬 악샵, 피스 나우'조차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위험하다면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는 더 위험한 인물이다. 부시와 샤론의 공통점은 둘 다 힘을 갖고 있으며, 동시에 전쟁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기본은 힘이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도덕적 명분을 앞세우고, 이스라엘은 현실적 논리를 앞세운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쟁은 명분이나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구실이자 핑계일 따름이다.

역사에서는 늘 전쟁을 원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을 두고 그것은 필연적 사건이었다거나 우발적 사고였다는 식의 해석은 늘 뒤에서 하는 얘기다. 전쟁은 언제나 전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들에게 전쟁이 목적이냐 수단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쟁의 정당성은 결코 그것의 필요성에 우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해라! 그러나 전후 질서의 변화로 하여금 평화의 필요성을 극대화함으로써 대화의 테이블로 모두를 이끌어 내자! 억설(臆說)이지만 '대화를 위한 전쟁'은 허가한다! 전쟁이 없으면 평화도 없을 테니까. 한때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언제나 전쟁이 끝나면 앞장서서 대화와 평화를 주장해 왔다.

화해란 적(敵)과 하는 것이라며. 전쟁 영웅들이 종종 노벨 평화상을 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전쟁을 하지 않고도 평화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 참혹한 전쟁이 지나가면 반드시 샤론 평야에 화약 냄새보다 더 진한 오렌지와 레몬 꽃 향기가 다시 진동을 하게 되겠지.

최창모 건국대 교수(히브리학과).예루살렘 히브리대학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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