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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6·25동란 당시의 주일공사는 김용주씨였다.
김용주씨는 대한해군공사 사장으로 있던 것을 신흥우박사가 주일대사를 사임하자 허정 교통부장관의 추천으로 외교관이 된 사람이었다.
김 공사는 동경에 부임하여「맥아더」사령부에 신임장을 제정한 후 곧 영친왕을 예방하였는데 그 때의 인상을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영친왕을 뵈 온 것은 바로 그 전해에 경제사절 단원으로 동경에 갔을 때인데 왕자의 풍도 라고 할까, 털끝만큼도 거짓이 없고, 훈훈한 그 인품에 우선 머리가 수그러졌습니다.
그리고 나는 영친왕이라는 분은 열 한 살 때에 볼모로 끌려와서 한 평생을 일본에서 지내왔고 또 부인도 일본황족인 만큼 우리말은 전혀 못할 줄로 알았었는데 실상 만나보고 나니 어쩌나 한국말을 잘 하시는지, 그것도 우아한 궁중용어만 쓰시는 데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일공사가 되어 동경에 갔을 떼에는 6·25동란이 격심할 때였는데 영친왕은 내가 인사의 말씀을 올리자마자 우선「이 나리에 국민들은 대체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고「이 대통령도 안녕하시냐? 고 국가원수에 대한 인사도 잊지 않으시고 깍드시 하는 것을 보니 제왕 학을 공부한 분은 역시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인 1948년 8월18일에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일본에 대하여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더니 그 다음해인 49년에는 또 대일 배상을 청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여「스캡」(SCAP·연합국 최고사령부)의「시볼트」=외문국장과 미 지상군사령관(제8군)「마이클·파커」중장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 그들은 이 대통령의 대일 정책은 너무 강경해서 그대로 하다가는 일본의 치안도 유지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는데「시볼트」외교국장이나「파커」중장은 다같이 유명한 친 일가였으므로 사태는 더욱 심각하였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그런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이『재일 조선인 총 연맹을 즉시 해산하고 동경에 있는 전 조선총독부출장소 건물과 조선은행과 조선장학회와 동양척식회사의 동경지점 건물도 즉시 반환하라』고 더욱 강경한 성명을 발표하니 당시「연합국 최고사령부」에 있어서 가장 큰 두통거리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 일본에 거주하는 좌우양익의 한국인 문제였던 것이다.
일본수상「요시마·시게투루」(길전무)가『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정 그렇게까지 대일 이상을 고집하고 요구한다면 우리로서는 한국에 두고 온 건 일본인의 재산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해방 후 처음으로 강경한 태도를 표명하고 연합국 최고사령부에 대해서도 장문의 「메모랜덤」(각서) 을 제출한 것은 다 그때의 일이다.
이 대통령은 김용주씨가 공사로 부임한 뒤에도 조금도 태도를 변하지 않고 그의 대일 정책은 더욱 더 강경해져서 이번에는 전기 반환요구에다 동정에 있는 영친왕의 저택까지 넣어「대일 배상」에 포함시키라는 훈령을 내리었다.
그리하여 주일 대표부 김 공사로 하여금 즉시 연합국최고사령부에 그것을 교섭토록 하니「스캡」에서도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어서 긴급 회의를 열고 그 대책을 강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정을 지었었다.

<8·15해방으로 일본인이 한국에 두고 온 재산이나 일본에 있는 전 조선총독부 관계의 재산은 속지주의의 원칙에 따라 그 지역 정부나 정권에 예속하는 것이므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수긍할 수 없으며 다만 대일 배상 청구권문제만은 후일 한-일 회담에서 토의 결정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됨.>
이리하여 이 대통령의 강경한 요구는 하나도 실현을 보지 못하였고「스캡」당국이 말한바와 같이 다만 배상문제만 그후 한-일 회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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