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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김을한|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죽은「지미·김」(길준)과 그의 부인 그리고 어린 아들의 세 유해는 동경에 있는 미국인 교회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후「요꼬하마」(횡빈) 화장 장에서 불살랐다. 그리하여「지미·김」일가의 유골은 그해 8윌 초순에 본국으로 가져다가 부산공동묘지에 매장하였는데 그보다 먼저 영친왕의 마음을 가장 슬프게 한 또 하나의 비극이 있었으니 그것은 홍사익 중장의 사형이었다.
일제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학도병으로, 혹은 격용으로 전선에 끌려갔다가 억울한 희생이 된 한국사람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지만 홍사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였다.
그는 경기도 안성사람으로 충군애국을 가훈으로 하는 집안에 태어났었다. 그리하여 장래 국가의 간 성이 되고자 유년학교의 생도가 되었으나 미 구해서「한-일 합병」이 되었기 때문에 동기생 34명과 함께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전학하여 대한제국의 군인이 되려던 것이 뜻밖에도 일본제국의 간 성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1915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소위에 임관되고, l920년에는 육군대학을 졸업하여 소좌가 되었는데 과거의 일본 육군대학은 상당히 들어가기가 힘드는 학교로서 당시 한국사람으로서「육대」를 나온 사람으로는 영친왕과 홍 중장의 두 사람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육군대학만 나오면 출세도 빨랐으니 사관학교를 나온 장교는 잘 해야 대좌(지금의 대령) 밖에는 되지 못하건만「육대」만 나오면 중장까지는 미리 약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요, 운수가 좋으면 대장도 원수도 될 수가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러므로 일제시대에 한국사람으로 더구나 순 민간 사람인 홍사익씨가「육대」를 나와서 중장까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홍중장에게는 비범한 실력이 있었으니 한국사람에게는 절대로 연대장도 주지 않던 그 시대에 여단장을 지내고 참모본부 경제부장, 종합전술학교 부 교장 등의 요직을 역임한 것을 보면 일본 전성시대에 있어서 그의 실력이 얼마나 비상했던 가를 잘 알 수 있다.
홍 중장이「필리핀」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된 것은 태평양전쟁의 거의 마지막판인 1944년3월로서 만주의 공주 영 전술학교에 있을 때인데 발령을 받자 그는 어찌하면 좋을지를 몰라서 번민하였다. 첫째 그때까지의 관례로는「육대」출신의 중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일뿐더러, 그보다도 패전이 확실하게된 그때의 포로수용소장으로 부임한다는 것은 후일 반드시 보복을 받을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기는 한국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는 더욱 주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판명된 일이지만 그때 일본군부에서는 연합군의 총 반공으로 전세가 날로 악화해 본토방위에만 급급하였는데 그들이 제일 걱정한 것은 내란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지나 않을 까를 가장 우려하였었다. 그것은 당시의 비밀 정보로 조선인의 지원병이나 학도병이 자꾸 탈주하는 사실이 드러났으므로 한국의 인심은 이미 이 반되었으며 어느 날 어느 때에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반란이 난다면 누군가 지도자가 필요할 터인데 만일 홍 중장과 같은 최고의 군사지식을 가진 인물을 수령으로 삼는다면 큰일이라고 해서「도오조」(동조)등의 일본군벌은 홍 중장을 전례에 없는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허울 좋은 추방이었는데「필리핀」으로 부임하기 전에 홍 중장은 서울 본가에 와서 약 한달 동안을 묵었었다. 선조의 성묘를 하고 가족들과도 최후의 작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후 며칠만 있으면「필리핀」으로 떠난다는 어느 날 저녁에 필자는 동경 제국「호텔」에서 그를 만났었다.
평소부터 존경하는 선배요 또 그의 속마음을 잘 아는 까닭에『「필리핀」으로 가지 말고 광복군이 있는 중경으로 가는 것이 어떠냐?』고 농담 비슷하게 말했더니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이번에 가는 길이 설사 죽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조선사람이 수백만 명이나 전쟁에 동원되었는데 최고지위에 있다는 내가 만일 그런 일을 한다면 병사들은 물론, 징용된 노무자들까지 보복을 받을 것이니 다만 나 혼자만을 생각해서 그런 경솔한 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홍 중장은 이같이 생각이 치밀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필리핀」으로 가서 포로수용 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결국 전쟁범법자로 몰려서 교수형을 받을 것까지는 아마 그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계속>
※본보(90)회 기사 중「하지」중장은 제24군단장 겸 주한 미군사령관이 정확하다고 국방부 이규일 작전참모차장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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