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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신주류로 뜬다] 5. 인터넷/운동권 네트워크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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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 2000년 9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벌어진 남북 병사의 총격 살인 사건을 담은 영화 '공동경비구역JSA'가 흥행 신기록을 수립했다. 금단의 우정을 쌓아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6백만 관객은 눈물을 흘렸다. 이 영화로 '쳐부숴야 할 북한괴뢰군'은 '초코파이를 함께 나눠먹는 친구'로 다가왔다. JSA를 만든 박찬욱 감독은 민노당 당원이다. 여중생 사망 사건과 관련해 삭발한 행동파이기도 하다.

#2 2000년과 2001년 각각 선보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은 70.80년대 운동권 출신들이 만든 인터넷 언론이다. 이곳을 찾는 네티즌들은 마음에 드는 기사나 동영상을 다른 사이트로 퍼다 나르고, 싫은 대목에는 '댓글'을 달아 곧바로 '방법'(네티즌의 은어로 응징한다는 뜻)한다. 요즘은 보수적인 인사들도 이들과의 인터뷰에 적극적이다. 네티즌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있는 그대로 알리는 하나의 통로로 여기기 때문이다.

#3 지난해 촛불시위는 사고 현장에 달려간 이용남씨가 직접 찍은 두 여중생의 참혹한 주검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것이 도화선이 됐다. '앙마'라는 네티즌이 "광화문에서 반딧불이가 됩시다"라는 글을 올린 지 보름 만에 코흘리개에서 노인까지 10만여명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국내 인터넷 메신저 이용자의 90%가 온라인 상장(喪章)달기 운동에 동참했다. 촛불 시위 동안 007시리즈 영화 '다이 어나더 데이'는 '영화 안보기 운동' 역풍에 고전했고, 맥도널드 햄버거는 불매운동에 직면했다.

이 같은 새로운 흐름들은 2000년대의 '운동'이 어떻게 인터넷 등 다양한 미디어를 매개로 얽히는지를 잘 말해준다.

'옳다/그르다'보다는 '좋다/싫다'쪽인 인터넷 세대들은 평소 게임이나 엽기 사이트를 유목민처럼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이슈를 만나면 갑자기 수십만명씩 거리로 쏟아진다.

월드컵이란 비정치적 축제에서 '붉은악마'로 등장한 이들은 여중생 사망과 반미라는 정치문제를 만나 촛불 시위대로 나타났다. 지난 대선에서 노사모를 통해 정치 지형까지 바꾼 것도 이들이다.

지난 15일에는 전 세계 1천여개 도시.마을에서 1천1백50만명이 반전 시위에 참가해 미국의 이라크 공격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뉴욕 타임스는 17일 "지금 세계에는 두 개의 수퍼파워가 있다. 하나는 미국이고, 하나는 인터넷을 통한 국제여론"이라고 보도했다.

연세대 김용학(사회학)교수는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종전과는 다른 신(新)사회운동이 출현했다"고 말한다.

金교수는 신사회운동의 특징을 다음의 몇가지로 요약한다.

뚜렷한 동원 조직이 없다. 있어도 모호하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목적과 동기가 다양하다. 참여하는 사람들의 집단 경계가 불명확하다. 물질적 가치보다 비물질적 가치에 의해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지난 대선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또 가장 극적인 형태로 신사회운동과 선거가 결합한 사례"라고 金교수는 진단했다.

명지대 김익한 교수(기록관리학과)의 진단은 한발짝 더 나간다.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운동이 사이버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다. 보수파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반면 운동권 출신들과 20대는 인터넷을 통해 조직화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적어도 10년 이상 이어질 것이다. 운동권 주변 인물들이 그동안 사회 각계로 흩어져 있다가 네트워크를 통해 결집하면서 사회 전반을 서서히 장악해 갈 것이다."

인터넷은 정치와 정당의 개념을 바꾸었다. 개혁국민정당은 인터넷이 탄생시킨 정당이다. 인터넷 동호회에 착안한 개혁당은 정당도 온라인 정치커뮤니티로 꾸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

창당 주역인 개혁당 유시민 집행위원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출발했다면 온라인은 개인들이 자발적인 정치결사체를 완성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라고 말했다.

6개월 만에 4만3천명의 당원을 확보한 개혁당은 내년 총선에서 제도권 정당과 어깨를 겨루게 된다.

대선 기간 노사모 홈페이지엔 매일 30만명 이상이 방문했고 70억원 이상이 모금됐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의 대선특집 코너는 투표 전날 하루 동안 접속건수가 5백만건을 넘었다. 차상호(41)노사모 대표는 "대선 전날 밤에는 1987년 시민항쟁이 노사모 홈페이지에서 재연된 느낌이었다"고 돌이켰다.

운동권 출신들은 인터넷 네트워크에 본격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같은 학번끼리, 같은 학과끼리, 같은 서클끼리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어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생활인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다시 결집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설명>
1980.90년대 운동권 세례를 받았던 세대들이 이제 인터넷을 통한 네트워크로 2000년대 신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 됐다. 영화.출판.인터넷언론 등 전문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운동권 출신들의 대중 흡인력도 강하지만, 어떤 이슈가 터졌을 때 순식간에 동원되고 모이는 '보통 운동권'들의 결집력 또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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