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너무 멀리 앞선 듯한 싱가포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남윤호
논설위원

실용과 개방이 이끈 적도의 기적, 아시아의 금융·물류 허브, 투명하고 깨끗한 정부…. 싱가포르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흠잡을 데 없는 그들의 효율이 부럽다 못해 얄미울 정도다.

 그 싱가포르에서 지난주 반관반민 형태의 한국·싱가포르 포럼이 개최됐다. 양국 협력을 강화하자는 취지의 대화 채널인 셈이다. 포럼 참석차 방문한 싱가포르의 도심엔 대형 크레인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건설경기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또 13일부터 열릴 자동차 경주대회 F1 그랑프리를 위해 도로변에 안전망을 설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휘청휘청하는 인도네시아·인도와는 달리 경제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포럼 당일인 8월 29일 현지 신문들의 1면 톱은 개각이었다. 장관이 된 이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현지 언론이 분석한 개각의 포인트는 세 가지.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에게 뛸 기회를 줬고, 여성 각료 비중을 높였으며, 30~40대를 과감히 등용했다는 것이다. 그날 포럼 만찬장에서 옆에 앉은 추아타이컹 전 주한 싱가포르 대사는 “10년 뒤의 리더를 키우기 위한 훈련”이라고 분석했다.

 싱가포르에선 인재를 숙성시키는 데 드는 시간을 그처럼 길게 잡는다. 정권 바뀔 때마다 물갈이다, 보복이다 하며 인사 파동을 겪는 우리와 달리 일관성 있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이 돌아간다는 얘기다. 정치는 짧고 경제는 길다지만, 싱가포르에선 둘 다 길다. 리더십의 혼란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없다. 도처에서 터져나오던 ‘점령하라’ 시리즈도 싱가포르에선 맥을 못 췄다. 다소 관헌(官憲)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국정관리가 뿌리내렸다. 이거야말로 싱가포르 번영의 비결 아닌가.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다. 1980~90년대를 기억하는가. 정치인·공무원·학자에다 언론까지 한 수 배우겠다며 싱가포르로 달려갔다. 모두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은 답변을 듣고 왔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나도록 배운 게 뭔가. 깨끗하고 효율적인 정부? 감탄은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 풍토에 기대하기 쉽지 않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경제? 좋다면서도 이해관계에 얽혀 못 하고 있다. 선하고 지혜로운 장기 집권체제? 어림도 없는 얘기다. 싱가포르의 성공 비결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따라 하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다.

 물론 싱가포르라고 왜 고민이 없겠나. 야당 지지율이 슬슬 높아지고, 지난해엔 26년 만에 파업도 일어났다. 지난 2월엔 독립 후 최초로 4000명 규모의 군중집회도 있었다. 얌전하던 택시 기사들도 심심찮게 난폭운전을 한다. 국민의 불만과 스트레스가 슬슬 표출되고 있는 분위기다.

 포럼 다음날 박병석 국회 부의장 등 한국 측 참석자들을 관저에서 맞이한 고촉통 명예 선임장관(전 총리)은 그에 대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했다. 싱가포르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실제 싱가포르 정부는 국민 불만을 의식해 정치 개혁과 소통 강화를 약속했다. 그 가시적 조치로 고위 공직자들의 거액 연봉을 왕창 깎았다. 총리는 28% 삭감, 대통령·국회의장은 아예 반 토막을 냈다. 그런 노력들이 외국에 더 좋은 인상을 준 모양이다.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싱가포르 예찬론을 썼다. 정치가 제대로만 하면 성장과 평등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데, 싱가포르가 모범사례라는 내용이었다.

 포럼을 마치고 귀국 비행기에서 집어 든 신문은 왠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종북세력은 총을 들자 하고, 야당은 길거리에 진을 치고, 귀족노조는 배부른 파업을 하고…. 싱가포르라면 전혀 겪지 않을 갈등들 아닌가. 포럼에 참석한 한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10년쯤 전엔 만만해 보이던 싱가포르가 지금은 따라잡기 어렵겠다 싶을 만큼 앞서 있다.” 짧은 일정 중 들었던 가장 아픈 말이었다.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