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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윽고 「워싱턴」발 AP전보는 「헐버트」박사가 이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 서울로 떠났다는 것과, 출발을 앞두고 「헐버트」박사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는 것과 일단 한국으로 가면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예정이라는 것도 전해왔다.
1949년 7월29일 오후였다. 이날은 「헐버트」박사가 선편으로 한국에 오는 날이다. 인천으로 달려가 보니 「헐버트」박사가 탄 「프레지던트·헤스」호는 멀리 외항에 정박해 있음이 보이건만 웬일인지 선객을 운반하는 조그마한 배(론치)가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몹시 안타까 왔다.
그날의 인천부두에는 미국으로 유학 갔던 국군 장교가 여러 사람 귀국할 뿐더러 미군군사고문단장의 부인이 온다고 해서군악대가 마중 나와 있었고, 수십 명의 미국인 남녀들이 그들의 가족을 마중 나온 듯 제각기 자동차를 몰고 와서 대기하고있었다.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 선객을 하나 가득 태운 조그마한 「론치」가 부두에 와 닿았다. 유량한 군악대의 행진곡 속에 군사고문단장의 부인이 먼저 상륙하고 국군 장교와 미국인 남녀선객들이 모조리 내리건만 웬일인지 우리 「헐버트」박사만은 도무지 보이지를 않았다. 박사를 마중 나간 사람들은 기다리다못하여 성큼 「론치」위로 뛰어 올랐다.
갑판을 지나 선실로 들어서니 그 곳에는 과연 백발이 성성한 키가 작은 노인 한 분이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 보고있지 않은가. 묻지 않아도 그이가 곧 「헐버트」박사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버림받은 짐짝과도 같이 딴 사람들은 다 상륙하였건만 유독 자기혼자만 외로이 남아있는 노 박사를 볼 때 그 모양이 몹시 처량하였다.
그 머나먼 길에 어쩌면 수행하는 사람 하나 없이 적 노인을 혼자서 오게 하였단 말인가. 마중 나갔던 사람들은 노 박사를 껴안다시피 해서 부두로 올라왔다. 그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으나 한국의 근대사를 잘 모르는 그 사람들의 눈에는 다만 한 사람의 평범한 노인으로만 보였을 것이요, 누구 하나 「헐버트」시사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고귀한 국빈의 상륙 제 일보로는 너무나 적막한 환영이었다.
바로 그 때에 미 군사 고문단장 부인을 환영하는 육군 의장대의 군악 취주가 끝나자 필자는 의장대를 지휘하던 원용덕 중령을 보고 덤으로 다시 한번 취주해 줄 것을 부탁했더니 그는 군인답게 선뜻 쾌락 하면서 『국빈을 위해서 또 한번 받들어 총!』하고 호령하였다. 수풀과 같이 수십 자루의 총이 일제히 높이 들렸다. 이윽고 유량한 군악 소리가 요란히 났다. 좌우 쪽으로 박사를 부축해 안은 우리들은 형언할 수 없는 감회를 품고 지휘관의 선도를 다라서 도열한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헐버트」박사의 노안에도 눈물이 어리었다.
경인가도를 달리는 자동차 한 대* 그 안에는 기나긴 여행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헐버트」박사가 피로한 몸을 내 던지듯 반쯤 누워서 주마등과 같이 지나가는 창밖에 풍경을 주의 깊게 내다보고 있었다. 박사의 표정은 마치 어떤 한국인의 소년 시대에 해외로 나갔다가 90노인의 되어서 다시 조국을 찾아 온 것 같아 자못 감개가 무량한 듯 하였다. 『제물포도 많이 변하였군!』(그는 인천을 꼭 제물포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노 박사는 무엇인가 명상에 잠겼다가는 까마득한 옛날의 기억이 문득 다시 머리에 떠오르는 듯 『고슴도치도 제 자식 귀여워할 줄 안다』 『자라보고 놀란 사슴, 소댕보고 놀란다.』라고 약간 더듬기는 하면서도 명료한 한국말로 『이런 말도 있지요?』하고는 깔깔대고 웃는 것이었다. 사람이 늙으면 다시 소년이 된다는 말과 같이 그 웃음은 천진난만한 그것이었다.
자동차가 서울역 부근을 지날 때 정면에 남대문이 나타나자 『오! 저기 숭례문이 보인다』라고 미칠 듯이 소리치며 그 옆으로 멀리 보이는 인왕산과 북악산을 눈물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삼라 만상이다 변하였어도 오직 「숭례문」과 「인왕산」과 「북악산」만은 여전하다고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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