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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해방에서 환국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05년 (광무 9년) 8윌8일에 미국 포트머드에서는 미국 대통령 「디어도·루스벨트」의 중재로 일로 강화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 틈에 제2차 일영 동맹이 체결되어 그 조문에 한국을 일본의 보호 하에 둘 것을 명백히 하였으며 곧 이어서 체결된 일로 강화 조문에도 그 점을 첨가 확인하게되니 일로 전쟁의 결과로 한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열강에 의해서 완전히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만 것이었다. 고종 황제도 펄펄뛰시고 정부에서는 즉시 관계 각국에 엄중 항의를 하였지만 쇠망하여가는 한 작은 나라에 대해서 성의껏 귀를 기울이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해 11월9일에 이등박문이 특명 전권 대사로 서울에 오니 시종무관장인 충정공 (민영환)은 그를 맞으러 정거장까지 나갔다.
이등은 공사 임권조를 대동하고 15일에 참여하여 고종께 배알하고 미리 써 가지고 온 조약 초안을 보인 뒤에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하고 서울에 일본 통감부를 설치할 것을 요청하였다. 고종은 천만 뜻밖이라 하시고 일본의 불신을 힐문한 후 일의 중대성에 비추어 각 대신과 원로와 민의를 들은 뒤에 결정하겠다고 하여 짓궂은 이등의 공갈을 거부하시었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병합 계획은 한 두번의 거부로써 소멸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등은 16일에 자기가 유숙하는 「손택 호텔」(정동에 있었음)로 각 원로 대신을 초청하여 회유하기에 힘썼고 17일에는 어전 회의에서 기어이 결말을 짓고자 하였다.
이날 시중은 철시를 하고 인심이 자못 흉흉하였다. 회의가 열린 덕수궁은 일본 헌병이 포의 하고 시내 도처에는 일본 군대가 늘어서서 공기가 지극히 삼엄한 중에 이등박문과 임권조가 입회한 가운데 어전 회의가 개최되니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도지대신 민영기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대신 권중현 등의 각 대신은 태도가 모호하여 왈가 왈부를 분명히 못하는데 유독 참정대신 한규설만은 명백하게 반대를 표명하였다. 국가의 중신이라는 자들이 그 같이 무능하고 비겁함에 고종 황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반면 수심이 가득한 가운데 이완용이 타협안을 제출하여 『지금 체결하는 보호 조약은 후일 한국이 부강해진 때에는 다시 개정한다는 조항을 넣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유명무실한 그 말을 핑계 삼아서 회의는 흐지부지 종결되고 이등의 협박 공갈이 주효하여 소위 「한일 보호 조약」은 끝내 체결이 되고만 것이었다. 장지연이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유명한 사설이 게재된 것은 바로 그때의 일이다.
이날부터 학생은 등교치 않았으며 상점은 문을 닫았고 인심은 극도로 흉흉하였었다. 민충정공은 자기의 책임도 아니건만 대사가 이미 글렀음을 깨닫고 필경 다음과 같은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경고 대한 이천만 동포 유서 슬프다. 국욕과 민치가 드디어 이에 이르러, 우리 인민이 장차 생존 경쟁 속에서 모두 멸하게 되었다. 무릇 생을 요하는 자는 반드시 사하고, 사를 기하는 자는 반드시 생을 득 하는 것을 제공은 어찌 양해하지 못하리요. 영환은 다만 일사를 결함으로써 우리의 황은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 제형에게 사하느니, 영환은 사하였다 하여도 사한 것이 아니라 제군을 구천 지하에서 기필코 도울 것이다. 다행히 동포 형제는 천만으로 분려 하고 지기를 굳게 가져 학문에 힘쓰고 합심 협력하여 우리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사자가 마땅히 명명의 속에서 희소할 것이다. 우리 대한 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결고 하노라.
그리고 민충정공은 각국 공관에도 원조를 요청하는 유서를 보냈는데 전의정대신 조병세, 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등 많은 사람이 선생의 뒤를 따라서 순국하였다. 소위 보호 조약이란 이러한 것인데 직접 한국을 침략한 일본이 가증한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지만 일본으로 하여금 마음놓고 한국을 침략하게 한 당시의 미국 대통령「디어도·루스벨트」도 결코 고마운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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