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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 깃든 옛날의 깊은 소리-천단강성씨 명예 문박 받고 기념 강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울 팬 대회에 참가한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가와바다·야스나리(천단강성)씨는 2일 하오2시 한양대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기념 강연을 했다. 펜 대회 일정과 관계없이 가진 이 강연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일본에서는 현재 엑스포70이 열리고 있는데 일본에 오는 사람들은 일본의 이상한 동물을 구경하러 나를 찾곤 한다.
인터뷰 때는 3백장 이상을 써야 하는 질문을 받기 일순데 이번에도 비행장이나 호텔에서 서울의 인상을 질문 받았다.
물론 이런 대답은 할 수 없으며 모욕을 얘기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신문 기사에는 『말이 적고 조용한 사람』이란 평을 쓰기 마련이다.
노자는 『말하는 자는 앎이 없고 모르는 자는 말한다』(지자불언 언자불지)고 말했다. 노자도 『말이 가깝고 뜻이 깊고 멀면 그것은 훌륭한 말』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면 제가 말을 안 하는 것이 내 권위를 높여 줄 것도 같다.
나는 작년에 하와이대의 아시아 태평양 언어 학부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고 6개월간 강의를 맡았었다.
여기서의 목적은 일본학 교수와 문인을 훈련하는데 있으며 일본어만 쓰도록 된 곳이었다. 나에게는 큰 다행이었다.
지금도 이 계획은 매우 성공적으로 계속되는데, 이것이 일인에게만 국한되지 말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 가령 한국 사람들을 훈련시킬 기회를 마련하도록 일본측에서 제안했다.
이 제안은 지금 집행위를 거쳐 총회에서 토의되고 있다.
아시아에는 나보다 나온 작가가 많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의 작품이 유럽 여러 나라에 번역된 것이 적기 때문에 상을 못 받을 것이다.
스웨덴·아카데미는 그 동안 아시아 측에게 상을 주려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기회에 내가 걸려는 것이다.
서울 「펜」대회 같은 큰 대회를 아시아에서 여는데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이 대화가 잘 알리는 것도 한국 정부와 국민의 합심의 결과로 보인다. 펜 대회를 성공적으로 끝내기를 기대하는 시민들의 표정은 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면서 보아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 열렸다면 전혀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놀랍지도 신기하지도 않은 일로 보이는 모양이다. 선진국이라든가 대국이라는 것은 물론 자랑스런 일이다. 그러나 선진했다는 것은 되쫓김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뒤에 선 사람이 앞지를 날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공업은 선진국의 공업을 능가하고 있다.
국민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지만 자기보다 나은 나라가 없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다. 오랜 역사에서 보더라도 나보다 나은 자가 없어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문학보다도 예술에서 이것은 현저히 드러난다. 새것에 맛을 느끼는 것보다는 옛것에서 더 깊은 맛을 찾을 수 있으며 거기에 오히려 새 것이 있음을 본다.
서울의 미술관에서도 그걸 느낄 것이다. 나도 소설가지만 9백60년 전에 쓴 자식부의 『원씨물어』는 지금까지도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다. 30대 여인으로서 이와 같은 근대적 장편을 썼다는 것은 놀랍고 자랑스런 일이다.
그것은 중국사가 사마천의 『사기』, 「단테」의 『신곡』에 필적하는 작품이다.
나는 하와이에서의 강연에서 『미의 실재와 발견』에 관해 얘기했는데, 일본 문학의 특징이나 미를 얘기할 참이었지만 호텔의 유리컵이 아침 햇빛에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나는 연제를 바꿨다.
나무의 녹색과 하늘과 바다의 푸른빛이 남국의 맛을 더 했는데, 그 컵의 빛깔은 아주 찬란했기 때문에 『유리컵에 비친 아침 해』를 즉흥으로 얘기하게 됐다. 이것이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리게 됐다.
한국 문화가 일본에 들어와 어떻게 영향을 주었나를 말하면 일본 일급의 국보인 법륭사를 비롯해 한국의 도자기나 명치유신에 있어서의 한국의 영향을 상기시키고 싶다.
한국 미술에 대해서 나는 많지는 않으나 관심을 갖고 있다. 날마다의 생활 주변에 한국 미술이 깃들여 있다.
내게 있던 민화 병풍 4폭은 족자로 만들어 갖고 있으며 연적과 필통도 여러 가지를 갖고 있다. 다도의 기구 가운데도 정호다잔을 갖고 있다.
방울 달린 문진도 갖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는 모른다.
그 방울은 방울과 방울이 부딪쳐 소리를 재게 만든 것이고 그 안에 방망이가 없다.
불승이 사용했던 것인지 혼자 쓸쓸한 곳을 걸을 때 경계용으로 쓴 것인지 나는 모른다. 방울에 방망이가 달린 것은 일본에선 매우 흔한데, 방망이 없는 내 방울은 글쓸 때 방울 소리를 내게 된다. 그 소리는 내가 글이 막혔을 때 큰 위안을 준다.
때문에 내 작품 속에 옛날의 깊은 소리가 깃들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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