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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턴십 교본과 불통의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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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

미국 정가의 실력자 존 베이너 하원의장. 재정절벽, 의료보험 개혁 등 이슈마다 발목을 잡아 오바마 대통령의 최대 앙숙으로 꼽힌다. 이런 그가 지난주 한마디로 스타일을 구겼다. 사무실 인턴 교육용으로 만든 80페이지짜리 내부 문서가 유출된 탓이다. 회식 때 만취한 인턴이 문서를 흘리는 바람에 한 인터넷 언론이 운 좋게 특종을 했다. 항목 중 하나인 ‘성공적인 인턴 생활 원칙’엔 솔직히 믿기 어려운 내용들뿐이다. ‘시키는 일만 하라, 항상 네라고 답하라, 언론과는 접촉하지 말라, 다만 (정치적 코드가 맞는) 폭스 뉴스 보도 내용은 늘 숙지해야 한다…’. 인턴 수칙은 “당신들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정점을 이룬다. 교본은 외부 인사가 방문했을 때 던져야 하는 유머의 세세한 내용까지 적시해 놓았다. 애드리브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문서가 인상 깊게 다가온 건 은밀히 감춰진 폐쇄적 문화가 미국 정치의 불통(不通)을 설명해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당연한 얘기지만 소통은 역지사지(易地思之)에서 출발한다. 입맛에 맞는 보도만 취하고 창의성을 부정하는 건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무보수 인턴들에게 이 정도의 경직된 규율이 강요된다면, 수뇌부들은 어떤 근본주의로 무장하고 있을까 쉽게 상상이 된다.

 실제 요즘 미국 정치엔 냉소와 비관만 가득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학자 겸 대통령 전기학자인 도리스 굿윈은 최근 CBS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대화와 타협은 워싱턴 정치에서 실종됐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대통령과 의회는 올 초 국가 부도 위기 앞에서도 끝내 시퀘스터(연방지출 자동 삭감) 발동을 막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볼썽사나운 모습만 연출했다. 대통령이 의회를 냉소적으로 언급하고, 야당이 주도하는 의회가 대통령의 미숙함을 공격하는 패턴은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 돼 버렸다.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워싱턴은 마틴 루서 킹 목사 열풍에 휩싸여 있다. 50년 전 “내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명연설로 인권운동의 새 지평을 연 그를 기억하는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정쟁을 일삼던 여야도 오랜만에 화합하는 모습을 연출 중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킹 목사의 신념은 오늘의 워싱턴 정치에 온전히 전해지고 있을까. 아니면 “당신들은 세상을 바꾸러 온 게 아니다”는 인턴 수칙이 미국 정치의 본얼굴일까. 어떤 경우든 인턴 교본부터 내용이 바뀌지 않는 한 미래를 기약하긴 어려워 보인다.

 “당신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작은 노력이 세상의 흐름을 바꾼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매체를 많이 접해야 균형된 사고를 할 수 있다. 예스보단 노(No)를 하는 용기를 지녀라….”

이상복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