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연극|이상적인 배우와 관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연극배우였던 윌리엄·버츠란 사람이 1909년 시카고에서 공연 도중에 총을 맞아 죽었다. 쏜 사람은 마침 연극을 구경하고 있던 장교였는데 그 사연이 재미있다. 그날 버츠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오델로』의 이어 고역을 맡고 있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이어고란 역은 그 간교하고 냉철한 악인으로서의 성격으로 유명하다. 그가 무어 장군 오델로를 전혀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속여가면서 그의 부인 데스데모나에게 부정의 의혹을 품게 하는 경과는 너무나도 잘 그려져 있다.
그 과정을 맡은 배우가 너무 강한 탓일까? 아니면 그 장교가 너무도 소박한 관객이라서 무대 위의 연극을 현실로 착각한 탓이었을까? 아무튼 그가 손에 쥔 권총이 한창 연기에 열중하고 있었던 배우 버츠를 한방으로 쏘아 죽인 것이었다.
순식간의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 곧 그 장교는 자기의 실수를 알고 같은 권총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숙의 끝에 이 두 사람을 같이 묻어주고 거기다 비석을 세웠다. 그 비명이 일, 『이상적인 배우와 이상적인 관객을 위해서.』
이 이야기는 너무 잘되어 있어서 약간 조작 같은 냄새가 나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무대 위에서 현실의 환영을 고스란히 재현하려 드는데 열중하는 근대 이후의 연극에서는 현실과 연극(즉 허구)을 착각하게시리 할수록 좋은 연극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과 혼동하게시리 할만큼 열연했다면 그 배우는 이상적일 수 있고 그것을 혼동한 관객은 다분히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의 목숨을 끊으면서까지 이상적인 관객으로 성인(?)했다는 것인데 그런 손님이 자주 생겨나다가는 공연은 중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 고유의 동화적 작용이 미치는 것은 일반적으로 관중이라는 복수의 대상이다. 연극 구경의 묘미는 구경꾼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별도로 주는 정서적 공감보다도 관중석 전체를 휩쓰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무대와 객석이 혼연일체가 되는 공동적 체험에 있다. 그리고 이점은 반드시 관중들 사이에 어떤 표면에 나타난 표현이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오히려 숨을 죽이고서 무대를 응시하는 그 정서적 긴장 속에서 더욱 유지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 흔히들 있는 일로 연극도중에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데 이럴 때 손님들은 매우 신경질적이 된다. 왠고하니 그 울음소리로 해서 무대 위의 대화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말한 긴장과 집중이 금세 깨어지기 때문이다.
경우는 옆자리에서 떠들어대는 일도 마찬가지다. 해서 연극의 에티케트의 첫째는 떠들지 말 것, 둘째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지 말 것, 그리고 물론 담배 같은 것을 피우지 말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화관에 가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손님이 연극 구경할 때는 곧잘 피우는 것을 본다. 특히 대학생들이..,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연극(또는 음악회·오페라 등) 구경갈 때 반드시 정장을 한다. 심지어 대학극장 같은 데서도 넥타이 한번 매본 적 없이 교실을 드나들던 학생이 공연 때에는 깍듯이 정장을 하고 나온다. 그것이 바로 예술을 존중해줄 줄 아는 사회의 하나의 형식으로 나타난 관습인 것이다. 그런 점이 우리 나라에서는 매우 아쉽다. 하기야 예술관계 수상식 때도 영예를 받는 당사자가 잠바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오는 정도니까 관극의 에티게트고 뭐고 따지는 게 쑥스럽기만 말이다. [여석기<고대교수·영문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