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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 함께 살아온「외솔」|최현배선생의 학문과 생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선생의 한글에 대한 연구의 시초는 주시경선생으로부터 한성고보에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광도고사」를 거쳐「경도대학」에서 선생은 철학을 전공하셨다. 선생은 귀국하면서「연희전문」에서 철학과 우리말문법을 강의하셨다. 선생이 우리말을 일제 때 연구한 것은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그의 학문은 민족운동과 떠나서는 없었던 것이다. 선생이 비록 철학을 전공하셨지만 평생을 국어학자로 보내신 것은「민족과 결부된 학문」을 하시겠다는 큰 뜻에서였다.
1941년인가 일제가 한글학자들을 탄압하던 때 감옥에 갇혀서도 한글을 어떻게 풀어쓸 것 인가를 연구하셨으며, 철저한 민족주의적 자세가 학문에 반영된 것도 선생의 국어학 연구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본다면 먼저 주시경선생의 문법체계를 계승하고 흡수하면서 현대 언어학적인 이론의 토대위에서 이를 발전시켰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우리말본』은 1937년에 출간되었지만, 33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양으로나 질로나 그를 능가할 만한 저서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선생의 학문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선생은 연희전문에 계셨던 1938년에 유억겸선생과 관련된「서클」관계로 수감되었었다.
그 뒤 선생은 일제의 압박으로 강의를 못한 채, 댁에 계시면서 예비금속상태인「요시찰 인물」의 위치에서도 한글의 역사, 우리의 글자에 관한 모든 문제를 집대성한 저서『한글갈』을 내놓으셨다.
선생의 생각이 순수한 학문에 머무른 것이 아니고 민족정신의 앙양을 목표로 했기에 선생은 그후에도『한글의 투쟁』『한글존중의 근본 뜻』『한글 가로글씨독본』『민족정신과 국민도덕』등을 저술했다.
선생은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말이나 문자생활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아갈 것인가에 목표와 초점을 두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한글전용」이었는데 이것은 선생의 평생의 소원이었다.
『한글의 투쟁』은 이 한글의 전용을 왜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를 취급한 것이었다.
다행히 금년부터 정부에서 한글전용을 추진하고 있는데 선생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문자생활이 한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다. 선생은 특히 언론·신문까지 한글화되기를 갈망하고 계셨다. 심지어는 당신이 힘만 있다면 무슨 방법으로든 한글전용의 신문을 만드시겠다고 늘 말씀하셨던 것이다.
선생의 평생의 염원은 우리가 볼 때 반쯤은 이루어졌을 때 돌아가신 점은 조금 위안이 되나, 선생의 마지막 목표였던『신문의 한글화』를 보지 못하시고 가신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언어라는 것은 조상으로부터 관습적으로 받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개인 개인의 창조적인 힘이 여기에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선생은 늘 강력히 주장하셨었다. 이것은 선생의 『국어사랑의 근본 뜻』에서 밝히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말은 한번도 세련받은 적이 없었다. 우리말은 개인의 언어창조적 기능이 다른 나라 말에서 보다도 더 강하게 작용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말의 표현법, 낱말등을 우리가 많이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 선생이 언어철학적 입장에서 구명하신바 업적인 것이다.
선생은 한글학회 이사장으로, 한글기계화연구소 소장으로, 세종대왕기념사업의 회장으로, 민족문화추진회 이사로 일하면서 공사를 혼동 않는 청렴결백한 정신으로 나라 사랑하는 학자의 길을 끝까지 걸으셨다.
그러한 선생의 이상이 상당한 점도 실현단계에 있으나 선생이 이상으로 생각하시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생각할 때 후학으로서 그 뜻을 이어 받을 각오를 새삼 굳게 갖게된다. 허웅<서울대문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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