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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통신] "미운 건 부시, 미국엔 반감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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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리는 미국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말도 안되는 전쟁을 밀어붙이는 조지 W 부시를 미워할 뿐이죠."

바그다드의 택시 운전사 자밀(39)의 말이다. "미국은 원래 우리의 적이 아니에요. 진짜 적은 이스라엘입니다. 미국이 왜 침공을 하려 드는지 모르겠어요."

걸프전에 참전했다는 회사원 압둘라(41)도 이렇게 거든다.

바그다드 번화가인 가라다 거리에는 '디즈니랜드'라는 상호에 미키마우스 그림을 내건 장난감 상점이 성업 중이다. 사둔 거리의 대형 극장에서는 장 클로드 반담이 주연한 할리우드 액션물 '인페르노'가 상영되고 있다.

아사트 거리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펩시콜라를 마시면서 미국 영화를 불법 복제한 말레이시아산 CD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 제국주의'에는 반대하지만 미국과의 일상적 교류는 환영한다는 것이 보통 이라크인의 생각이다.

이라크 정부도 미국인의 방문에 상당히 개방적이다. 지난해에만 언론인.학자.상사원 등 3천명 이상의 미국인이 바그다드를 다녀갔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 얘기가 나오면 태도가 달라진다. 이라크인이 후세인 대통령에게 보이는 경직된 '충성'은 북한을 방불케 한다. 차를 타고 바그다드 시내를 5분만 돌아다니면 동상.흉상.대형 초상화 등 최소한 10개 이상의 후세인 기념물과 마주치게 된다.

가게나 사무실에서도 후세인의 초상화를 피해갈 수 없다. 장남과 차남인 우다이와 쿠사이까지 3부자 초상화가 걸린 곳도 많다. TV에서는 '대통령 찬가'가 무시로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후세인을 거명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굳이 이름을 얘기할 때는 '사이디(나의 구세주)'라고 부른다.

미국의 공격이 임박한 이 시점에도 후세인의 권위는 표면상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다. 시민들은 정부나 전쟁에 대한 얘기 자체를 꺼리고 있다. "정부가 미국과 잘 담판해 전쟁을 막아줄 것"이라는 판에 박힌 말만 되풀이한다.

"후세인은 사회 곳곳에 비밀정보원을 심어놓고 북한의 '5호 담당제'와 비슷한 상호 감시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으로 24년간 철권통치를 해왔어요. 그런 후세인에게 국민들이 드러내 놓고 저항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두 차례의 전쟁에서 모두 패했는데도 '우리 식대로 살자'며 폐쇄 노선을 고집하는 후세인에게 지친 모습이 역력합니다."(바그다드를 여러번 다녀온 한국인 사업가)

정권에 묵종하는 '신민(臣民)'들에게서도 변화를 원하는 속내는 어렴풋이 감지됐다. 시민들과 장시간 대화하다 보면 "나라 시스템이 바뀌긴 해야 한다" "너무 오래 격리돼 있었다" "이대로 가면 영영 낙오될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이라크 경제가 개방돼 있던 1970~80년대 오일 머니로 호경기를 만끽했던 40대 중반 이상의 세대는 특히 변화에 대한 갈망이 심하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사업가(55)는 "1디나르(이라크 화폐)에 3달러까지 갔던 그 시절,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부럽지 않은 중동 최고의 부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디나르 가치가 달러의 2천분의 1도 안된다"고 간접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이라크인은 후세인에게 불만이 많지만 부시 미 대통령은 더 싫어합니다. 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바그다드 시내로 진입하면 시민들은 총을 들고 저항할 겁니다. 자칫하면 민간인이 대량 살상되는 최악의 상황이 빚어질 수 있어요." 유엔 관계자의 우려다.

그러나 현지에서 장기간 체류해온 한 외국인 사업가의 전망은 달랐다.

"미군이 바그다드에 진입하고 후세인 정권의 붕괴가 분명해지면 시민들은 순식간에 미국 편으로 돌아설 겁니다. 유목민족의 후손인 이라크인은 약육강식의 논리를 뼛속 깊이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걸프전 때 남부지역에선 이라크군의 패배를 목격한 주민들이 후세인 동상을 무너뜨린 사건도 있었어요."

그는 "이라크인은 후세인과 미국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며 "어차피 미국이 공격 결심을 굳혔다면 하루빨리 나라를 장악해 경제제재의 족쇄를 풀어주고 과거의 영화를 되찾게 해주면 그만이란 게 이들의 속마음"이라고 단언했다.

강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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