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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서소문 포럼

박근혜 vs 김정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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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강영진
논설위원

북한이 개성공단 재개 문제를 두고 결국 꼬리를 내렸다. 북한도 필요할 땐 꼬리를 내리는 일이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한국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항상 강경하고 공격적이어서 여간해선 꼬리를 내리는 법이 없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개월 전 북한이 개성공단 근로자 5만3000명을 한꺼번에 철수시킬 때만 해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마설마하던 일을 전격적으로 해치운 때문이다. 그때 기세를 생각하면 지금처럼 북한이 공단 재가동에 적극 나서는 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남북한 사이에 공단 재개를 둘러싼 기싸움이 있었다. 정부는 매우 강경했다. 북한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내세워 공단 운영을 어렵게 만드는 일은 결코 다시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한이 공단 중단의 책임을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보장하지 않으면 공단 폐쇄도 불사한다는 자세였다. 6차에 걸친 실무회담이 결렬되자 정부는 공단 입주 기업들이 신청한 경협 보험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폐쇄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북한이 불과 한 시간여 만에 꼬리를 내렸다. 개성공단 기싸움에서 정부가 북한에 완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보다 넓게 북한을 둘러싼 정세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우선 6월 하순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있었다. 중국은 박 대통령을 크게 환대했다. 독학으로 중국어를 배운 데다 어렵다는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꼽은 박 대통령에 대해 중국인들은 거침없이 친밀감을 드러냈다. 그런 박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북한 문제를 두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눴다.

 한 달 전 중국을 찾아온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특사 최용해 총정치국장을 잘 만나주지도 않고 냉랭하게 대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시 주석은 6월 초순 미국 방문에서도 북한 핵문제를 놓고 미국과 긴밀하게 협의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한마디로 중국이 북한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주저 없이 드러내 보인 것이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는 건 3차 핵실험과 3, 4월에 진행된 한·미 군사연습을 겨냥한 노골적인 긴장 고조 행위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이런 입장은 아직도 누그러지지 않고 있어 김정은 제1위원장은 중국 방문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이례적으로 길었던 장마로 인한 수해도 북한이 기싸움에서 손을 들게 한 요인으로 보인다. 피해 규모는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장마전선이 북한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앙큰물피해방지 연합지휘부’가 설치되고 도·시·군에도 연합지휘부를 설치한 것으로 보아 전국 대부분 지역이 크고 작은 수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지도층은 연이은 수해와 냉해로 식량 생산이 급감하면서 수십만 명이 굶어죽었던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처럼 국내외 정세가 악화되자 김정은 제1위원장은 개성공단 문제에서 양보를 통해 난국을 돌파해 보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단이 폐쇄되면 당장 수해 복구를 위한 외부 지원도 원활하지 못할 것이고 나아가 신의주, 해주, 남포와 나선, 원산 등지에 특구를 설치해 외자를 유치하려는 계획도 망가질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이 안팎 곱사등이 신세인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상당 기간 타협적 자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이 처한 어려움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이 ‘악용’했을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평소 원칙을 강조하는 입장에 따라 대북 정책을 펴나갔는데 마침 북한이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 시운(時運)이 따른다고 해야 할까.

 박 대통령의 시운이 남북관계의 선(善)순환적 발전에 기여하게 될까. 일단 출발은 나쁘지 않다. 꼬리 내린 북한을 나락으로 밀어넣는 악수만 피할 수 있다면 박 대통령이 주창해온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머지않아 궤도에 오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강영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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