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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국역된 두 고승의 글|서산·사명대사 문집 곧 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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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 불교 1천백 년을 통하여 처음으로 불승의 두 문집이 국역, 출판된다. 이 문집은 유명한 임란 때의 두 승군장 휴정과 유정의 것으로 『서산대사집』과 『사명대사집』. 이를 위해 동국역경원은 1년여에 걸쳐 자료 수집과 번역 작업에 힘을 쏟았다.
이 두 문집 번역사업에는 초역에 김달진(시인·역경위원), 정중환(동아대교수), 증의에 이운허(역경원장·승려), 윤석오(역경위원), 교열에 성낙훈(역경위원), 해제에 이기영(영남대교수), 윤문에 박경훈(역경위원)씨 등이 참여했으며 승군보 부분을 안계현(동국대 교수)씨가 조사 집필했다.
『서산대사집』에는 서산이 불교, 유교, 도교의 원리 중에서 수행에 지침이 될 만한 것을 골라 저술한 『삼가귀감』과 그의 시, 기, 서, 비명, 사기를 모은 『청허당집』4권이 수록된다.
특히 여기에 수록되는 서산의 서찰가운데는 임란 당시 그가 조신들에게 국란 타개책을 말한 것, 수도하는 승려들에게 가르침을 준 것, 승군을 모을 때 사명 등 승려들에게 기병을 촉구한 것, 국가와 민족을 위한 행동 지침을 말한 것 등이 있어 연구가에게 좋은 자료가 될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한편 원고지 4천 8백장의 『사명대사집』에는 그의 대표적 저술인 『분충서란록』과 허단보편『사명당집』그리고 서산대사의 행상과 가르침을 쓴『청허당 대선사 보장록』과『제영록』이 수록된다.
『분충서란록』은 서애 유성룡의『징비록』과 충무공 이순신의『난중일기』에 비견되는 임란 기록으로서 당시의 조선의 상황, 전쟁에 관하여 조정에 건의한 것, 전략 협의의 사항들이 상세히 실려있다.
사명은 수도인 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정치적인 제약을 벗어난 입장에서 솔직하게 사실을 기록했으며, 때로는 명군을 비판하고 때론 조정에 전략을 진언하는 등, 임란 당시의 일반적인 기록들이 자기 합리화의 방향에 기울고, 압력을 피하려는 조심성을 보인데 비해 적나라하게 이면을 밝히고있어 주목된다.
따라서 이 때문에 임란을 연구하는데 최상의 기록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사명은 스승이었던 팔도 십육종 도총섭 서산과 함께 승려의 몸으로서 국가가 위기에 있을 때 몸소 뛰쳐나와 승군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민족의 추앙을 받아왔던 것이다.
더욱이 이조에 있어서 배불 또는 억불의 정치 아래서 괄시받는 승려들이 호국의 대열에서 뒤서지 않았다는 것은 신라이래 고려에 이르는 호국 불교의 전통을 살린 뚜렷한 업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사명대사집』에 함께 실리는 『승군보』는 우리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승군의 역사를 총정리 했다는 점으로 귀중한 자료다.
역사상 승군은 신라 때도 있었으나, 「승군」조직을 가지고 나타난 것은 고려 숙종 때 왜구를 몰아내는 역할을 하는데서 보인다고 안계현 교수는 말한다.
그러나「승군」의 존재는 가장 불교가 괄시받고 「도첩」제가 실시되던 이조 초기에 비로소 두드러지며 임란 중의 승군의 활약은 가장 빛나는 것이었다.
승군은 임란 이후의 부역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인조 때 남한산성은 승「각성」이 숙종 때, 북한산성은 승「성능」이 감독을 맡고 승려를 주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부역에 참가하는 것이 필요했다고는 하지만 승군의 갈등은 승려들에게 가득찬 호국 불교의 정신과 그들이 내면에 가지고 있던 철저한 국가·민족사상의 발로로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사명대사집』과『서산대사집』의 국역 출판은 그 의미를 한 층 깊게 하는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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