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을 가다] 자생식물 이용 기술개발 사업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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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한반도에는 4천여종의 자생식물이 자라고 있다. 국내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종도 4백여종에 이른다. 국토 면적에 비해 생물의 다양성 정도는 세계 최상위 그룹에 속한다.

첨단 생명공학 기술을 접목하기에 따라 잠재 가치는 무한하다. 숨어 있는 보물을 캐기 위해 과학기술부는 2000년 4월 21세기 프런티어연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사업단(이하 자생식물사업단)'을 발족했다.

지난 3년간 52개 기관에서 43개 과제에 9백40여명의 연구원이 참여, 모두 3백50여억원이 들어갔다. 자생식물사업단의 현재 모습을 살펴봤다. (편집자)

지난 14일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본관 오른편의 유리집처럼 생긴 온실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채집해 온 20여종의 식물 건조작업이 한창이었다.

실험실로 옮겨져 분해되기 전까지 거치는 필수단계다. 온실과 바로 붙어 있는 자생식물사업단 3층 건물에 들어서자 한약방처럼 약초 냄새가 풍겼다.

1층 사무실에서 만난 정혁(48)단장은 '인공 씨감자'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 예나 지금이나 투박한 인상이지만 날카로운 눈초리만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중국에서만 자라는 자생식물을 구하기 위해 출장을 갔다 바로 전날 도착했다"는 정단장과 얘기를 나눠봤다.

-자생식물이 왜 중요한가.

"우리에게 석유와 같은 지하자원은 절대 부족하지만 자생식물의 다양성만큼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초일류급이다. 오죽하면 진시황제가 한반도에서 불로장생초를 구하려고 특사를 보냈겠나. 식물 자원은 국가적으로 보고나 다름없다."

-자생식물에서 무엇을 찾고 있나.

"우리 조상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민간요법을 써왔다. 배탈이 나면 쑥죽을 해먹는 것이 그 예다. 이제 후손들이 할일은 어떤 약초가 단순히 몸에 좋다는 차원을 벗어나 약초 안의 어떤 분자가 질병치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상업화 가능성은 충분한가.

"지난해 기능성 건강보조식품 시장이 1조5천억원에 달하고, 미국 시장만 1천억달러(약 1백20조원)로 급성장하는 중이다. 질병의 치료보다는 예방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이다. 또 운좋게 신약을 잡으면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독점하고 있는 치료용 신약시장에서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다."

실제 미국의 제약회사 BMS를 돈방석에 앉게 해준 암 치료제 '탁솔'의 주성분은 태평양 지역에서 자라는 주목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것이고, 아스피린 또한 호주 원주민들이 버드나무 껍질을 달여먹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어 상품화한 물질.

1920년부터 2000년까지 80년간 발표된 5백20종의 신약 가운데 40%인 2백여종이 식물로부터 얻어진 것이란 통계도 있다.

자생식물사업단이 지난 3년간 중점적으로 추진해온 일은 인프라 구축 및 핵심 기반기술의 확립.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일을 벌이기 전에 튼튼한 기초가 절실하다는 판단에서다.

우선 남한에서만 1천5백여종을 채집,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벌였다. 이를 위해 국제분류학회 표준규격에 맞는 영문판 '한반도 종합식물지' 발간 사업이 서울대 박종욱 교수팀에 의해 착수됐다. 지난해 11월부터는 북한의 식물분류학자들과 공동연구 방안도 추진돼왔다.

또 채집한 식물을 부위.계절.장소.연대별로 분리한 뒤 , 추출물로 '자생식물 표준 추출물 은행'을 만드는 중이다. 지난해 말 현재 1천68종으로부터 2천1백25점의 시료가 만들어졌다.

각 연구현장에서 시료를 요구할 경우 분양하는 시스템도 갖췄다. 이 작업을 맡고 있는 생명공학연구원 이형규 박사는 "예전에는 재래시장 말만 믿고 재료를 구해 실험하다 보면 같은 결과가 재현되지 않은 적이 많았다. 나중에 알고 보면 다른 종이었다"고 말했다.

각 추출물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분석이 잘된 천연생약은 은행잎.가시오가피.인삼 등 세가지.

이중 은행잎은 이미 혈액순환제로 널리 보급된 상태며, 가시오가피는 소련의 우주비행사들이 먹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일 바이엘사에 의해 강장제로서 과학적 효능이 입증돼 제품화됐다.

국내에서도 경희대 김호철 교수팀이 가시오가피의 성분 가운데 어린이들의 뼈 성장을 촉진시키는 물질을 찾아내 상품화가 진행 중이다. 자생식물 사업단은 국내에서만 나오는 흰털오가피.섬오가피 등 자생 오가피의 추가 연구 결과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인삼으로부터는 비만 치료제가 개발됐다. 생명공학연구원 김영국 박사팀이 인삼에서 신규 화합물을 발견, 국내 바이오벤처 기업에 4억원의 선금을 받고 기술을 이전했다. 원광대 손동환 교수팀은 약용식물에서 간경화 치료성분을 밝혀내 발표를 앞두고 있다.

생명공학연구원 감자연구팀은 장티푸스.바이러스성 설사병 등에 대한 가축용 식용백신 감자를 곧 선보일 예정이다. 또 치매예방용 식용백신 연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감자의 유전자를 변형해 감자가 치매를 일으키는 'β아밀로이드'라는 물질을 만들도록 하는 연구도 진행 중이다. 이 감자가 나오면 감자만 먹어도 치매 백신을 맞는 것 같은 효과를 거둘 것이다.

정단장은 "지금까지 사업단 내에서 78건의 특허출원이 이뤄졌으며, 오는 4월 말까지 10건의 기술이전 계약이 체결될 것"이라며 "기초연구도 꾸준히 이뤄져 SCI 논문 1백27건을 포함, 2백여건의 논문이 발표됐다"고 덧붙였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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