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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초연 20년..「자르」평원|<런던·타임즈=본사특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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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라오스」에서「게릴라」전이 일어난지 20여 년 동안 격전지「자르」평원을 두고 좌파군과 우파군은 공방전을 해왔다. 내분이 전쟁으로 확대된 것은 60연대에 접어들어서였다. 1960년 공수단의 일개 대위에 불과했던「콩·레」는「비엔티앤」에서「쿠데타」를 일으켜 「수바나·푸마」공을 수상으로 옹립하여 중립정부를 세우려했다. 이와 같은「콩·레」의 음모를 우파의「분움」수상과「푸마·노사반」장군이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노사반」장군이나「분움」수상은「타일랜드」및 미CIA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수바나·푸마」와「콩·레」는「비엔티앤」에서 쫓겨나「자르」평원의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자르」평원의 동쪽에는「수바나·푸마」의 이복형제인「수파누봉」이 지휘하는 공산「파테트·라오」군이 진을 치고있었다. 이와 같은 세파 중에서 월맹은「파네트·라오」군을 지원해 주었다.
1962년 재개된「제네바」회의는「라오스」에 중립연립정부를 세워야한다고 결정했고, 따라서 모든 강대국의 간섭은 끝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얼마나 지속될까 의문이었다.
특히「비엔티앤」의「과데트·라오」파 각료들은 연정의 조건이 자기들에게 불리한 것을 알았다.
우파에 대항하면서 연정을 수립하기 위해 중립파와 좌파가 한때. 공동전선을 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곧 깨져「수바나·푸마」공은 좌파에서 이탈했다.
그런 다음 중립파 자체 안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중립파의 일부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흡수되었고「자르」평원 서쪽에 있던 나머지는 「수바나·푸마」영도 하에 머무르고 있었다.
1963년까지 월남전이 격화되고「파데트·라오」 군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월맹이「라오스」안에서 맹렬한 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전쟁은 2개의 양상을 띠었다. 하나는 월맹에서「라오스」를 통해 월남 또는 동북「캄보디아」의 밀림에 이르는 요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또 하나는「자르」평원을 중심으로 한 북부「라오스」에서의 전쟁이었다. 이곳에서의 전쟁은 월맹이 만족하는 중립 내지 좌파정부를「비엔티앤」에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비엔티앤」서 실권을 쥐고있던 좌·우 중립파의 혼합정치 내지 군세력과「타일랜드」는 이와 같은 도전에 대해 항전키로 했다. 역사적으로「타일랜드」는「라오스」에서 이해관계가 있는데 이 이해관계는「베트남」의 이해관계와 대립되는 것이었고「타일랜드」는 미국이 뒤에서 밀어주고 있다.
좌파 중립주의자였던 외상「퀴님·폴세나」의 암살에 뒤이어 중립주의자였던 치안국장의 살해사건 등은 세 파간의 대립에 더욱 부채질했다. 「라오스」사태의 험로를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다.
▲63년=「자르」평원의 중립파 진지에 대한 공산군의 공격.
▲64년=「비엔티앤」에서 우파가 군부「쿠데타」를 일으켜「수바나·푸마」정부를 전복, 「푸마」는 후에 수상자리에 돌아갔으나「파테트·라오」측은 그를 그때부터 수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64년=영국과 소련이「파리」에서 회담을 열고 해결책 모색.
▲65∼66년=월남전의 격화로「라오스」내전은 무관심 속에 파묻혔으나 세 파간의 전투는 계속.
▲67년=총선으로「수바나·푸마」실권회복.「파데트·라오」측, 선거「보이코트」.「파데트·라오」군,「자르」평원 굳게 장악.
▲69년=「라오스」침투 월맹군이 1만명에서 2만명으로 격증.
▲69년=월맹군 4만명 이상이「라오스」에 주둔.「타일랜트」기지에서 출격한 미공군기,「자르」평원 맹폭으로 정부군 대부분의 평원요지 재탈환.
▲70년 초=「수바나·푸마」공,「자르」평원 중립화제의. 미군기, 평원내의 민간인 2만3천명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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