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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세상탐사

친구의 자랑스러운 언론인 아버지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사귄 친구 아버님이 큰 신문사의 광고국장이셨다. 자가용이란 말이 귀에 설던 시절, 번쩍거리는 검정 ‘피아트 124’ 뒷자리에 늠름하게 앉아 계시던 분이었다. 배기량 1200cc밖에 안 돼 요즘 기준으론 소형이지만 1970년대 대한민국 고속도로에서 따를 차가 없던 고급 차였다.

 친구를 따라서 신문사 견학도 했었다. 그 신문사 건물이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란 건 한참 뒤에야 알았다. 설령 알았더라도 작품을 감상할 만한 심미안은 없었겠지만, 당시로선 보기 드문 콘크리트 고층건물 옥상의 위압적인 송신탑이 인상적이었다.

 기억에 없는 걸 보면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편집국 풍경은 그리 감동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터인데, 그래도 아버지 뒤에서 친구들에게 으스대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요즘도 있는지 모르지만, 가정환경조사서 같은 걸 쓸 때면 친구는 아버지 직업란에 당당히 ‘언론인’이라고 적고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때로는 몇몇 친구들이 “광고국장이 무슨 언론인이냐?”고 이의를 제기해도 친구는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언론사에 다니면 언론인이지, 무슨….” 친구가 자랑스러워하던 그의 언론인 아버지가 다니던 신문사는 한국일보였다. 분명 자랑스러워할 만한 신문사였다.

 창업주인 초대 장기영 회장은 말 그대로 뛰어난 언론인이었다. 부총리나 국회의원 같은 수식어가 또 있지만 ‘언론인’ 장기영만큼 그를 잘 나타낼 말은 없어 보인다. 처음으로 기자 공채를 실시했고 학력 제한도 두지 않았다. 요즘처럼 사설을 두세 개씩 쓰는 관행도 그로부터 생겼다. 당시 한국일보 기자들은 사장실에서 먹고 자며 신문만 생각하던 그를 ‘장 기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의 카리스마에는 못 미쳤지만 2세 회장 장강재도 언론인이었다. 당대 최고 배우 문희를 아내로 맞아 주간지 센터폴드 사진으로 만족하던 소년의 부러움을 샀던 그는 ‘월요일자 발행’ ‘조·석간 동시 발행’처럼 공격적 경영에 나섰다.

결과적으로 성공작이 되진 못했지만 80년대 말 우후죽순 생겨난 신문사들의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그가 쉰도 안 된 나이에 타계하지만 않았어도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눈을 감으면서 그는 “정정당당한 신문을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친구의 자랑스러운 언론인 아버지가 다니던 자랑스러운 신문사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장기영 회장은 창간사에서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고 썼지만 이제 이 신문은 ‘너도나도 이용하는 신문’이 됐다.

이후 경영을 맡았던 장강재 회장 동생들은 도무지 언론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와 형의 유지를 받들어 좋은 신문을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신문사를 마치 사금고로 이용한 흔적들만 또렷하다. 4남 재국과 5남 재근씨가 횡령 등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남인 재구씨(현 회장)도 배임 등 혐의로 검찰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상태다. 장기영 회장의 다섯 아들 중 셋이 사법처리를 받았거나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정정당당한 신문을 만들 의지나 능력이 없다면 이제 내려놓는 게 좋겠다. 용역을 동원해 기자들을 내쫓은 다음 통신 기사를 오려 붙이고 가짜 바이라인을 단 ‘짝퉁 신문’을 만든 순간, 언론인으로선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는 아직도 보수를 받지 못한 용역들만 속인 게 아니다. 새로 지은 사옥 자리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권리를 자신의 빚과 바꾼 뒤에도 1면에 “다시 돌아와 거듭나겠다”는 사고(社告)를 냄으로써 회사 직원들은 물론 독자들까지 우롱한 것이다. 걸어 잠근 편집국 안에서 짝퉁 제조에 참여했던 몇몇 기자들도 처절한 반성이 필요할 터다.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는 것인 까닭이다.

 지금, 친구의 자랑스러운 언론인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경복궁 앞에 우뚝 솟아있던 건물도 남아 있지 않다. 친구는 한 토목회사의 임원이 돼 있고, 팔자에 없던 기자가 된 내가 친구의 자랑스러운 언론인 아버지가 다니던 신문사의 오늘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오랜만에 친구한테 연락해 봐야겠다. 함께 소주라도 한잔 나누면서 지금은 명동의 한 건물에 세들어 살고 있는 그 신문사가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랑스러운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원해 봐야겠다. 자랑스러운 언론인 아버지를 둔 친구를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