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보다 3.5%로 금리 통일 '관치금융' 결정판 된 재형저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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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 연 3.5%. 8개 은행이 29일부터 판매하는 7년 고정금리 근로자 재산형성저축(재형저축)의 최고 금리다. 7년 고정이 아닌 ‘3년 고정+4년 고정’을 택한 경남은행을 제외하면 끝자리까지 모두 같다. <표 참조>

 # “역마진 위험이 커 부담스럽습니다. 이미 내놓은 상품도 사실상 판촉을 그만둔 상태인데….” 고정금리 재형저축 상품 출시에 참여하지 않은 은행의 한 관계자의 말이다. 7년 고정금리 재형저축은 지난 3월 나온 ‘3년 고정금리+4년 변동금리’형의 후속작이다. 하지만 상품을 출시한 은행 수는 전작의 16개에서 이번엔 9개로 줄었다. 참여한 은행들 사이에서조차 적극적인 판촉에 나서겠다는 기류는 감지되지 않는다.

 금리는 맞춘 듯 같고 은행들은 신상품을 내놓고도 주춤댄다. 왜 이런 묘한 상황이 빚어졌을까. 은행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상품이 아니라 당국의 압박에 마지못해 내놓은 ‘관치 상품’이기 때문이다.

 18년 만에 부활한 재형저축은 근로자들의 목돈 마련을 돕겠다는 새 정부의 공약에서 비롯됐다. 당국의 ‘드라이브’에 3월 은행들은 일제히 상품을 내놓으며 대대적 판촉에 나섰다. 그 결과 출시 첫 달에만 140만 개 가까운 계좌가 개설됐다. 하지만 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6월에 개설된 신규 계좌는 2만여 개로 줄었다.

 고객들은 7년이나 돈을 묻어둬야 한다는 부담에다 첫 3년 이후 적용될 변동금리가 어떻게 변할지 몰라 가입을 주저했다. 여기에 은행도 사실상 마케팅에 손을 놨다. 경기가 갈수록 불확실해지는 데다 은행 이익이 반 토막 나는 등 수익성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장기 고금리 예금을 받는 게 부담스러워진 탓이다.

 흥행이 기대에 못 미치자 금융 당국은 은행권에 ‘보완 상품’을 주문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금리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없었다”며 “다만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사회공헌성 상품인 만큼 이익 남길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당부는 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국내 은행이 이런 장기 고정금리 예금 상품을 만들 능력도 경험도 없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금리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갈수록 오리무중인 상황이 되면서 은행이 감당해야 할 리스크는 그만큼 커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 입장에선 역마진 위험이 큰 상황인데 가능하면 금리도 높여 가입자가 늘기를 바라는 당국의 바람도 무시하긴 어려웠다”고 말했다.

 결국 은행-은행 간, 은행-당국 간 치열한 눈치보기가 벌어졌다. 일단 ‘모난 돌이 정 맞는’ 상황만은 피하자는 분위기가 생기면서다. 실제로 한 시중은행의 경우 당초 내부적으로 책정한 최고 금리는 3.5%보다 낮았다. 하지만 결국 3.5%로 결론 냈다. 이 은행 상품개발 담당자는 “ 다른 은행 상황을 알아보니 우리보다 금리가 높았다”며 “은행 리스크 담당 부서가 강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그 수준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진통 끝에 만들어진 상품이지만 은행권에선 흥행에 회의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3월 출시된 상품의 최고 금리가 3년간 4.5~4.6%인 상황에서 고객들이 굳이 1%포인트나 낮은 상품에 당장 돈을 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금융권에선 당국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편으로는 은행 수익성이 ‘발등의 불’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익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상품 출시를 독촉하고 나서는 등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최수현 금감원장은 최근 7개 금융지주사 회장들과의 모임에서 적자 점포 정리, 성과연봉체계 개선 등 비용 절감 대책을 강하게 주문하기도 했다. 금융지주사 관계자는 “벌써부터 노조에서는 수익성 악화가 관치 탓이라고 반발하고 나서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조민근·이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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