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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미래 vs 전쟁과 과거…남북이 전혀 달랐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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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정전 60주년 기념식’에 참전국 대표단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27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열병식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평양=로이터TV]

정전 60주년을 맞은 27일. 남과 북에서 시간은 엇갈리게 흘렀다. 차단의 벽, 군사분계선(휴전선)의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제시된 시대정신은 너무나 달랐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평양에선 두 개의 기념식이 동시에 열렸다. 같은 시각, 같은 기념식이었지만 형식과 내용, 메시지는 전혀 달랐다.

한국은 미래와 평화를 말했지만 북한은 과거에 집착한 채 전쟁을 거론했다. ‘과거의 상흔을 잊고 미래로 가자’는 호소와 ‘60년 전의 적개심을 이어가겠다’는 주장은 뚜렷하게 대조됐다. 서울 행사장에선 합창과 함께 화합의 메시지가 울려 퍼진 반면, 각종 무기를 전시한 평양의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에선 호전적인 구호가 가득했다.

60년이란 긴 시간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다름’. 40년을 더 채워 100년이 되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이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27개국 정부 대표와 외교사절, 6·25 참전용사와 시민·학생 등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유엔군 참전·정전 6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함께 지켜온 60년, 함께 나아갈 60년’이란 주제에 담겨 있듯 이날 기념식의 화두는 ‘미래’였다. 식전 행사도 경쾌한 가락의 농악과 전통 궁중무용, 참전국가의 민요 메들리 등으로 꾸며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새로운 평화와 희망의 시대’를 역설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60년간 한반도에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한 평화가 유지돼 왔으며 전쟁이 잠시 멈춘, 세계 최장의 휴전기간이 이어지고 있다”며 “이제 대결과 적대를 멈추고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어야 한다.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와 희망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무장지대(DMZ)의 세계평화공원 조성계획도 다시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정전협정 제1조 1항에 규정된 DMZ는 최소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며 “중무장지대가 돼 버린 DMZ의 작은 지역부터 무기가 사라지고 평화와 신뢰가 자라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과거에는 서로 총부리를 겨눴지만 이젠 정전협정을 맺은 당사국들이 함께 국제적 규범과 절차, 그리고 합의에 따라 평화공원을 만든다면 그곳이 바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당사국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그 시각,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선 1만여 명의 군인과 탱크·미사일 등을 앞세운 이른바 ‘전승절’ 열병식이 진행됐다. 군사 퍼레이드에 앞서 최용해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연설에 나섰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도 참석했지만 ‘원수님의 위임에 의해 대독한다’며 최 총정치국장이 연단에 섰다.

김 위원장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으려면 누군가 대독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5분 연설의 대부분은 “6·25는 승리한 전쟁”이란 강변과 끊임없는 전투의식 고취에 할애됐다. 최 총정치 국장은 “6·25는 우리에게 엄혹한 시련이었다. 외세가 강요한 전쟁으로 도시와 마을이 잿더미로 변하고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세계의 예상을 뒤집은 우리의 승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의 영도가 가져온 역사적 기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위대한 김정은 시대를 맞아 경제문화 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초미의 과제로 내세우는 우리에게 평화적 환경은 더없이 중요하다”며 “하지만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전체 인민군 장병과 인민들은 총과 창 위에 평화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 어떤 외세의 침략도 단호히 물리칠 수 있도록 전투동원 태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화를 내세우긴 했지만 실은 전쟁 준비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했음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정전 60주년 기념식은 이젠 어엿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된 개방적 민주국가와 6·25 때보다 더 퇴보하고 위험해진 폐쇄적 독재국가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줬다”며 “북한은 강함이 부드러움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남북 관계와 한반도 미래에 대한 남북한의 입장도 정반대였다. 박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확고한 억지력과 국제사회와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북한이 도발할 생각을 멈추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나오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일관된 원칙과 신뢰를 토대로 북한과 신뢰 구축을 위한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고 남북한 공동 발전의 길을 적극 열어갈 것”이라며 “북한이 핵 개발을 포기하고 진정한 변화와 평화의 길로 나서는 한편 북한 주민들의 민생과 자유를 책임질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올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놀라운 기적은 국민의 헌신과 노력, 참전용사들의 피와 땀으로 지켜낸 자유와 평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위대한 우리 국민이 자랑스럽고,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후세에도 널리 알려 그분들의 헌신을 역사에 남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날 기념식은 모두가 친구이자 함께 가는 동반자라는 내용이 담긴 노래인 ‘That’s what friends are for’를 참석자들이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나 6·25에 대한 북측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졌다. 최 총정치국장은 “수령이 없으면 조국도 없고 자신도, 가족도 없다는 각오로 수령을 위해 청춘과 목숨도 바쳐 왔다. 이런 우리의 정신은 억만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핵폭탄보다도 위력 있는 것으로, 전쟁을 강요한다고 해도 무서울 게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인민군대의 붉은 깃발을 제1군기로 높이 들고 나가게 하고 인민 대단결을 새로운 단계로 올려세웠으며 우리의 병기창을 더욱 튼튼히 다졌다. 이제 위대한 김정은 시대를 맞아 사상강국에서 경제강국, 문명강국의 고지로 힘차게 전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이날 워싱턴DC 한국전 참전 기념공원에서 열린 정전 60주년 기념식에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참석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5일 발표한 정전기념일 선포문에서 “이날은 전쟁의 종결 뿐 아니라 새로운 번영과 평화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미 의회도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촉구하는 상·하원 공동 결의안을 추진 중이다. 상원에선 팀 케인 상원의원이, 하원에선 6·25 참전용사인 찰스 랭글 하원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이 결의안은 이달 말이나 다음 달 초께 채택될 전망이다.

안성규·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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