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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아유브·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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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1면

한때 개발도상국가의 모범이라고 찬양받은 「파키스탄」의 60년대는 적어도 정치면에서는 한 마디로 전진도 후퇴도 없는 「제자리걸음」이었다.
58년10월7일부터 69년3월25일까지의 10년 수개월간 세계 최대의 회교국가인 「파키스탄」을 독재정권을 통해 손아귀에 꽉 쥐었던 실력자 「모하메드·아유브·칸」대통령은 이제 잊혀져가는 한 병든 야인으로 신병치료에 여념이 없다. 부정 축재했다는 구설수도 아직 그를 괴롭히고 있다. 집권 후 강력한 친미적 지도자로 일관해 오다 캐쉬미르를 둘러싼 인도 파키스탄 전쟁 후 미국의 인도지원에 반감을 품고 중공에 추파를 던지는 친공 노선으로 선회했던 「아유브·칸」의 퇴진은 역사의 우연이긴 하나 10년 전의 자신의 집권과 극적 무대효과가 너무나 흡사했다.
58년10월 이 나라 정치가 혼란의 극에 이르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부패의 농도가 짙어 국내가 소요 기운에 말려들자 당시의 대통령 「이스칸데르·미르자」는 계엄령을 선포, 「아유브·칸」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다.
군사대권을 한 손에 거머쥔 「아유브·칸」은 자기를 절대 신임해 준 「미르자」대통령을 영국으로 축출, 의권을 장악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은 절대자와 같은 「아유브·칸」으로 하여금 국가의 통치권을 자기의 육군참모총장 「아가·모하메드·야햐·칸」에게 물려주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정치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이러하여 「아유브·칸」은 자기가 정권을 빼앗은 것과 흡사한 방식대로 권력을 빼앗겼다.
서구 민주주의의 「파키스탄」토착화라는 「슬로컨」아래 기본민주주의를 요란하게 내세운 「아유브·칸」의 독재정권은 국민총생산에 있어 58년에 비해 55%의 성장을 과시하고 만성적인 식량부족을 자급자족으로 개선했을 뿐 아니라 3차 5개년 계획을 통한 경제계획 결과 1인당 국민소득(67년 현재)을 3백81「루피」(80불)로 비약시키는 등 경제정책분야에서 대의의 찬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서 보여준 공보다 독재방식·빈부의 격차 증대, 편파적 동「파키스탄」정책에서 뚜렷이 나타난 그의 정권의 실책의 측면이 장기집권에 비례하여 증대 강조됐다.
「파키스탄」의 부패를 거론할 때 이른바 『파키스탄의 22인 가족』의 횡포를 빠뜨릴 수 없다. 이들 신흥귀족은 이 나라 제조기업체의 66%, 보험업의 70%, 은행업의 80%를 차지, 경제를 좌우했다.
그뿐인가 일부 정치인들은 「아유브·칸」과 그의 가족의 부정축재를 낱낱이 조사, 그들을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어 신병에 시달리는 그는 또한 「심병」의 구속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게 됐다.
62년에 육군대위를 그만둔 「아유브·칸」의 아들 「고하르·아유브」는 백만장자로서 부친의 집권 때는 정부의 비호를 얻어 이나마 자동차 업계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지중해의 「사르디나」섬 해변에 호화판 별장과 많은 사병을 두어 거드럭거렸다고.
그의 정적들은 「고하르」의 외환부정관계를 조사하자고 아우성이다. 이들 일가는 외국은행에 재산을 도피시키고 있다는게 정적의 주장이다.
19세 때 영국 「샌드·허스트」사관학교에 들어간 것을 인연으로 평생의 대부분을 군인으로 보낸 「아유브·칸」이 부정축재혐의로 심판대에 오를 것인가의 여부는 아직 미지수.
행동은 군주와 같았지만 말만은 『나는 「파키스탄」의 친구이지 군주는 아니다』고 했던 그는 정치에선 완전히 손뗐으나 그의 앞길엔 아직도 숱한 가시밭길이 남아 있다. <신상갑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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