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 미스터리 … 500건 중 대화록·녹음파일만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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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밝힌 18일 국가기록원 직원들이 대화록을 제외한 나머지 자료들을 국회 운영위 회의실로 옮기고 있다. 여야는 이날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를 열고 22일 국가기록원 산하 대통령기록관을 방문해 대화록 존재 여부를 최종 확인하기로 합의했다. [김형수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간 2007년 정상회담 대화록이 증발했다. 박경국 국가기록원장은 18일 국회 운영위 보고에서 국가기록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보관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전대미문의 사초(史草) 실종 미스터리에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물론 과거 정부와 현 정부의 인사들 모두 당혹하고 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8일 “저희들도 솔직히 좀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다” 고 말했다. 노무현정부 인사들도 “대화록이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라고 반응했다.

 최장 30년 동안 당사자(노무현 전 대통령)를 제외하면 누구도 볼 수 없도록 ‘비밀문서’로 봉해 놓은 대화록을 국가기록원에서 찾지 못하자 정치권은 책임 공방에 휩싸였다. 정상회담 대화록은 정상적이라면 ‘노무현 청와대’의 문서관리 시스템인 이지원(e-知園)에 저장됐다 퇴임 후인 2008년 2월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돼 이후부터 이명박정부에서 관리돼 왔어야 한다. 그러나 ▶여야 열람위원들이 대화록을 찾지 못한 데다 ▶국가기록원도 보유하지 않고 있다고 밝힘에 따라 이 세 단계 중 어느 단계에서 대화록이 증발했는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화록이 폐기된 게 확인될 경우 논란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공방에서 사초 파기 파문으로 증폭될 전망이다. 진실 확인을 위해선 검찰 수사로도 번질 수 있다. 다만 민주당은 대화록이 국가기록원 어딘가에 보관돼 있을 가능성을 고수하고 있어 아직 변수는 남아 있다.

“노 전 대통령 폐기” vs “이지원 통째 넘겨”

  박경국 원장이 노무현정부에서 넘긴 ‘대통령기록물 자료목록’에 정상회담 대화록은 없다고 밝히자 새누리당에선 노 전 대통령 측의 폐기 의혹이 증폭됐다. “안 넘겼기 때문에 찾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여권 관계자는 “만약 대화록이 폐기돼 넘어오지 않았다면 이를 지시할 사람은 최고 결정권자인 노 전 대통령밖에 없는 게 아니냐”고 했다. 이와 관련, 이명박정부의 핵심 관계자는 “2008년 정권을 인수했을 때 노무현정부 청와대로부터 A4용지 한 장 넘겨받은 게 없다”며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말 국정원에 보관된 대화록까지 폐기토록 지시했다는 얘기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을 지낸 김경수 노무현재단 봉하사업본부장은 “대화록은 2007년 10월 국정원이 작성한 초안이 보고된 뒤 안보정책실의 최종 보완을 거쳐 그해 12월 이지원 시스템을 통해 노 전 대통령에게 보고됐다”며 “대통령 보고·재가를 거친 이지원 문서는 청와대 1부속실의 기록물 담당 행정관이 지정기록물로 처리한 뒤 기록관리비서관실을 거쳐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됐다”고 밝혔다. 통째로 다 넘겼다는 주장이다. 노무현정부 인사들은 그 근거로 이지원 시스템의 특성을 든다. 청와대의 모든 업무를 최초로 전산화한 이지원 시스템에선 보고·결재·열람·검색 등의 모든 업무 기록이 남기 때문에 고의적 누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국가기록원의 대통령기록물관리 시스템인 PAMS(팜스·President Archives Management System)에 이지원 기록이 그대로 넘어갔다고도 주장했다.

“봉하에 있을 수도” vs “ MB정권 의심”

새누리당은 정권 교체기인 2008년 노 전 대통령의 퇴임 직후도 의심하고 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은 전임 대통령이 재임기간 만들어진 기록물의 열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열람이 기술적으로 어려워지자 노 전 대통령 측은 이지원 시스템과 데이터의 사본을 봉하마을 사저로 가지고 내려갔다. 이에 당시 이명박정부와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은 노 전 대통령이 국가 소유의 기록물을 불법으로 반출했다고 반발했었다.

 이한구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지난해 대선 국면에서 노무현정부 때 이지원의 자료를 봉하마을로 갖고 간 뒤 (나중에 노 전 대통령 측이 이를 반환할 때) 전부 넘긴 게 아니고 일부만 전달했다는 논란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스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기록물 중 일부가 국가기록원으로 반환되지 않았고, 거기에 정상회담 대화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 측이 반납하지 않고 별도 보관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이다.

 이에 대해 노무현정부에서 기록관리비서관을 지낸 임상경 전 대통령기록관장은 “전임 대통령이 성남의 대통령기록관까지 가서 열람해야 하니 힘들어 이지원 시스템으로 재임기간 자료를 정리하려 했던 것”이라며 “그걸 정치 공세로 삼아 결국 다 돌려줬다”고 반박했다.

 민주당에선 오히려 이명박정부에서의 폐기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고위정책회의에서 “참여정부에서 기록물을 삭제하거나 폐기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며 “만약 기록물이 없는 게 확인되면 국정원 댓글 조작 등의 전과가 있는 이명박 정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인사는 “대화록을 공개해도 시원찮을 판에 뭐 하러 대화록을 폐기하나”라고 반박했다.

‘엔엘엘’ 키워드 검색해 다른 자료는 찾아

  정치권 관계자는 “여야가 요구했던 사전·사후 정상회담 준비자료 등은 500여 건에 5000∼6000페이지 분량으로, 거의 다 확인됐는데 대화록과 녹음파일은 없었다”고 밝혔다. 다른 관계자는 “지난 17일 열람위원들이 국가기록원을 찾았을 때 요청했던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며 “그런데 기록원 관계자가 ‘아무리 찾아도 대화록은 없다’고 해 모두가 말문을 열지 못했다”고 했다.

 반면 임상경 전 대통령기록관장은 “대통령기록관에 이지원 시스템의 기록을 다 보내 어느 하나만 빠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신 “민감한 비밀 문서는 제목을 ‘별칭’으로 기록하는 게 관행이고 정상회담은 보안이 중요해 더욱 그럴 수 있다”며 “비밀문서는 아예 ‘별표(****)’로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만큼 검색이 아직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엔엘엘(NLL)’ 등의 키워드가 포함된 다른 자료는 대부분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반면 유독 대화록과 녹음파일만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새누리당과 민주당 일각에선 상대를 겨냥해 폐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못 찾게 만들어 놔” “사후관리에 의혹”

  김 봉하사업본부장 등 노 전 대통령의 참모들은 “국가기록원이 끝내 회의록을 찾지 못하면 국가기록원의 참여정부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직전 대통령의 추천으로 임명하는 대통령기록관장은 5년 임기가 보장되는데 이명박정부는 2008년 7월 기록관장(임상경)을 대기발령시킨 뒤 쫓아냈다”며 “따라서 그 이후 대통령기록관이 기록물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우리로선 전혀 알 수 없다”며 관리 부실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핵심 당직자는 “넘겼는데도 못 찾는 것이라면 그건 30년 후 열람이 가능해진 시점에서도 못 찾는다는 의미”라며 “그렇다면 노무현정부 측이 사실상 찾지 못하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 있어도 못 찾으면 그게 폐기가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주장했다.

글=채병건·김정하·강인식 기자
사진=김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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